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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Nov 06. 2024

구름과 하나 되다

반디

‘자연특별시’ 무주에 걸맞은 상징적 존재는 반딧불이이다. 청정자연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 ‘반딧불이’ 이외에 ‘반딧불’, ‘반디’도 표준어다. 그래서 무주엔 반딧불이의 일생을 소개하는 ‘반디랜드’도 있고 ‘반딧불장터’도 열린다.     


지난 글에 소개한 김환태문학관 옆에는 지붕이 한옥 처마선 모양새인 건축물이 있다. 복합문화시설인 이곳의 이름은 ‘무주 상상반디숲’이다. 이 안에 도서관이 있는데 ‘형설지공도서관’! “반딧불 · 눈과 함께 하는 노력”(형설지공)을 이름으로 달고 있다. 이렇게 반딧불이라는 이름은 무주 곳곳에서 다양한 빛깔로 반짝반짝거리고 있다.          



단풍

꽃은 남쪽에서 올라오고 단풍은 북쪽에서 내려온다. 이건 해발고도에도 해당됨을 지난 10월 말 여행 때 절실히 알았다. 무주 평지엔 단풍이 거의 없었다. 적상산 고개 중턱을 넘어갈 때까지도 그랬다.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해발 860미터쯤 오르자 단풍나무 식구들이 모여 있었다. 조그마한 시골 동네주민처럼. 바로 무주양수발전소를 위해 만든 저수지 적상호 주변이다.     


연두가 탈색되기 시작한 단풍, 노란 단풍, 주홍색 단풍, 가장자리만 붉은 단풍, 통으로 붉은 단풍이 그곳에 있었다. 중간중간 억새들이 하늘거리며 호수 풍경을 운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늘은 조각구름만 떠다니다 금세 사라지는 푸른 하늘이었고. ‘적상’( 赤裳: 붉은 치마)의 산까지는 못 보았더라도 나의 단풍 갈증은 이걸로 해갈되었다.          



겸손

조선왕조실록 사본이 있고 건물 자체도 이전 복원된 ‘적상산 사고’를 들렀다. ‘사고’(史庫)는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이다. ‘실록각’과 ‘선원각’ 두 누각 건물이 있었다. 맞배지붕 구조이고, 측면에 비바람이 들이치지 못하도록 거대한 방풍판을 달아놓았다. 완전무장한 수비대 대장 같다.     


실록각의 좁고 낮은 통로 계단을 오를 참, 놀라운 발언을 들었다. 동료 중 하나가 저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서 ‘겸손’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 와우! 길 가다 보물을 주운 기분이었다.     

그런데 내부 구경 다하고 내려올 때 나는 ‘거만하게’ 내려왔다. 낮은 줄에 달린 과자 따먹기 하듯 고개와 등을 뒤로 젖히고 내려온 것이다. 나는 키만 컸지 수행이 부족하다.     


우리는 걸어서 적상산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 저편으로 다음날 우리가 오를 덕유산 향적봉이 보였다.     


저기 구름 그림자도 보인다. 조각구름이 지는 해를 등지고 도드라지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오리를 닮았네. 구름을 보고 어떤 형상이 떠오르는지는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다. 고양이도 보이고 여인의 얼굴도 보인다. 조각구름의 수명은 10여 분 정도. 조금씩 이동하다 흩어짐이 조각구름의 운명이다. 이제 우리도 내려갈 시간.          



구름

운해(雲海)였다. 다음날 덕유산 설천봉(1525미터) 근처에서 접했다. 전날과 달리 구름은 대기 상층, 중층, 하층에 고루 걸쳐 있었다. 존속 시기가 짧은 구름의 나라였다.     


향적봉(1614미터)까지 가는 길은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안개, 구름을 헤치고 가는 길이었다. 내 꿈 중의 하나가 구름 속에서 노니는 것이었다. 얼마 전  『구름 공항』이라는 그림책을 보았다. 한 번 보시라.   

   

그런데 덕유산에서 구름 속에서 노닌 것이다.      


향적봉엔 사람이 많아 구름이 자리를 피해 있었다. 최고봉에 올랐으니 이젠 다음 목적지 중봉(1594미터)으로 향할 차례. 겨울 잠바같이 두툼한 구름을 내려다보며 산등성이를 탔다.    

 

주목 군락지에서 일행들이 멈췄다. 내려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뒤에 쳐져 있던 나는 중봉까지 가고 싶었다. 말리는 이도 있었지만 먼저 다녀온 동료들이 감탄을 하던 차라 오기가 난 것이다. 끝내 혼자 중봉에 올라섰다. 그때 모습을 액자소설로 꾸며 보았다.      


“박(나)은 마지막 주자였다. 중봉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싼 구름은 그냥 있지 않았다. 강풍에 떠밀려 산비탈을 타고 올라와 박의 몸을 뒤덮었다. 이내 세찬 빗방울이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중봉 아래 사방을 둘러싼 비구름은 박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유혹했다. 빗방울 세례를 받은 박은 마음이 혼미해졌다. 그는 구름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양팔을 벌려 뛰어내리면 구름이 사뿐히 안아줄 것 같았다. 근처 무뚝뚝하게 서 있는 주목나무가 박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중봉 정상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그의 머릿속에 전날 신선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기행 버스, 김환태문학관의 낭만적이고 심미적인 형상들, 억새가 동반한 단풍 풍경, 벗들과 함께 한 감미로운 머루와인, 아낙네들의 친근한 말씨, 탈선할까 봐 밤새 내 옆을 지켜준 대장부 동료 등등.     


그는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동료들이 그리워진 것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되돌아가는 길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달렸다. 중간에 곤도라 티켓이 끼어 있는 명찰을 떨어뜨린 것도 몰랐다. 밑에서 박을 부르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추위가 온몸을 에워쌌다. 향적봉에 도달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살아 돌아왔다. 동료들은 박을 위로하려 그새 자신들이 캐 온 열두 가지 버섯을 한데 모아 전골을 끓여 주었다(버섯전골 식당). 그 전골은 박의 온몸을 녹여주었다. 박은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정말로 탈진된 상태라 버섯전골을 많이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전골 속에 들어간 버섯 이름을 알고 싶은 호기심은 잃지 않았다.      


서빙하는 친구를 재촉했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버섯 글자는 생략하겠다. 꽃송이, 노루궁뎅이, 팽이, 능이, 백만송이, 새송이, 표고, 느타리, 목이, 은이, 소간 등등. 버섯 덕분에 내 몸은 기운을 차렸다.      


문득 중봉 근처에 떨어뜨린 내 명찰은 잘 있을까 궁금했다. 내 흔적을 남기고 와 다행이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라제통문’ 옆 ‘눌인김환태문학기행비’를 마지막으로 들렀다. 문학비 뒤쪽으로 무주 구천동 계곡을 흐르는 원당천이 빗물을 모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틀 동안 무주 산천을 누볐다. 구름과 노닐었다. 진한 여행이었던 까닭에 훗날 이곳에 대한 추억이 반딧불이처럼 반짝반짝 떠오를 것 같다.            


관련 글) 나비의 욕망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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