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부터 5월까지 일 때문에, 또한 서로가 만류하는 사회 분위기상 여행할 수 없던 시기에 나는 영화 하나로 간접 여행을 하곤 했다. <리틀 포레스트>가 그 영화다. 4계절 시골과 자연 풍경을 한껏 담아놓고 있는 이 영화 속에서 봄꽃 마을, 짙푸른 녹색, 누렇게 익어가는 논, 적막한 농가 밤 풍경을 하루 일을 방에서 끝내고 보았다.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젊은이들의 장래 고민이 들어 있지만 긴장된 사건, 클라이맥스 같은 것이 없는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 되었고 여행이 되었다. 내가 저런 여행지에 있었어야 하는데 하고 시샘하면서 봤다.
그렇게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은 자기만의 '작은 숲'을 마음껏 누린다. 2018년 3월 개봉 즈음에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가 '문화초대석' 코너에 배우 김태리를 초대했는데, 그때 손석희 앵커는 이 코너가 자신의 '리틀 포레스트'라고 고백했다. 온통 정치 사회 뉴스를 다루는 시간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꾸거나 자연에서 얻은 산물로, 가출한 어머니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익힌 요리 솜씨로 각양각색의 음식을 해 먹는 장면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런데 주인공 혜원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고 또는 논두렁에서 쑥을 깨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잘 먹겠습니다!"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주인공 이치코는 "이타다키마스!(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가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같은 뜻의 감사 말이 두 영화에 같이 등장한다. 사실 일본 영화를 보면 식사 전 이 감사 말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행복한 사전>, <심야식당>, <아주 긴 변명> 등에서 보았다. "이타다키마스"의 유래를 나는 모른다. 기독교 인구는 아주 적은데 자연에 대한 신앙이 깊은 일본 문화 특성상, 자연에 대한 감사기도로 이해하는 정도다. 그런데 나는 이 간단한 감사 말이 마음에 든다. 나도 혼밥 할 때마다 작은 소리로 또는 속으로 "잘 먹겠습니다" 하고 먹는다.
대학시절 때까지 다닌 교회에서는 모임 때 식사 전 기도를 어느 한 명이 대표로 하곤 했다. 중장년들과 함께 하는 모임 식사에서는 보통 아주 길게, 자주 큰소리로 때로는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로 기도하곤 했다. 1분을 넘을 때도 있었다. 가톨릭으로 옮긴 이후(나는 개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성당 모임에서의 식사 전 기도는 단아했다. 짧은 공식 기도문이 있다. 가끔 성당 안에서 노래로 대신하고 식사하기도 했다.
신앙은 있지만 성당 출입을 안 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 나는 그런 기도문을 읊지는 않는다. 그런 나에게 영화 속 "잘 먹겠습니다!"는 좋아서 받아들였다. 물론 내게 감사의 대상은 하느님이지만 나는 그분을 한 종교에 매어 있지 않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분으로 생각한다.
10여 년 전인가 노숙인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두 가지 풍경이 오버랩돼 생각났다. 대학로에서 식사시간쯤인가 어느 개신교 단체가 노상에서 노숙인들에게 설교하는 풍경 하나, 그리고 역시 대학로에서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푸드뱅크' 버스 안으로 그런 설교하는 일 없이 그냥 노숙인들이 줄 서서 들어가 식사하는 풍경 하나. 만약 내가 신이라면 음식을 차려놓았을 때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뜸 들이는 시간 없이 먹었으면 하고 바랄 것 같다.
이것과 다른 내용! 또 만약 내가 신이라면 요즘처럼 감염병이 인류를 위협하는 시대에 무리해서 교회에 나오라고 하지 않을 것 같다.
5월 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는 법요식을 한 달 뒤로 미뤄 간소하게 치렀다는 뉴스를 접한 것이다.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우리나라 불교계는 그렇게 했다. 가톨릭에서는 올해 부활주일 미사를 온라인으로 대신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조니 뎁이 등장하는 영화 <초콜릿>을 다시 보았다. 1959년의 어느 프랑스 시골 마을. 배경지가 그래서인지 영어로 된 영화지만 원 제목은 프랑스 명('Chocolat : 쇼콜라)을 달았다. 이곳 시장인 레노 백작은 사순절 기간 금식과 절제를 중요시하고, 햇병아리 신부의 강론(설교) 내용도 대신 작성하는 마을의 정신적(그러나 두려움이 느껴지는) 지주다.
그런 마을에 딸과 같이 온 비앙(줄리엣 비노쉬 분)은 사순절 기간에 초콜릿 가게를 연다. 그런데 마야 문명의 피가 섞인 비앙의 가게는 마을 사람들 개개인에 맞춰 초콜릿을 매개체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치유의 장소가 된다. 비앙은 황혼의 나이에 든 남녀가 연인이 되게 해주고, 한 아이의 그림 솜씨가 성장하게 도와주며, 이 아이 할머니의 소원인 70세 생일 파티를 마련해준다. 또 한 여인이 폭력 남편에게서 해방돼 새 삶을 살게 해준다.
그런데 어떻게든 초콜릿 가게를 문 닫게 만들고 싶었던 레노 백작은 자신이 엄하게 교육시킨 신도가 집시들의 배에 불을 지르는 실수로 충격을 받고, 게다가 오랜 금식으로 배고픔에 허덕이다 이성을 잃고 가게 진열장의 초콜릿들을 칼로 난도질하고 만다. 그러다 우연히 입속에 튀어 들어온 초콜릿 조각 맛에 넋을 읽고 자신의 금욕을 무장해제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마야 초콜릿가게'에서 초콜릿을 통해 기적처럼 일어난다. 고행보다 사랑을 실천한 가게 주인의 지혜와 용기가 기꺼울 정도로 좋았다.
나는 앞으로도 "잘 먹겠습니다"라는 감사 말을 계속할 것이다. 전기밥솥이 고장 나 AS 보낸 뒤, 햇반과 동네 시장에서 산 반찬으로 한껏 차린 밥상 앞에서 그랬다. 어젯밤, 시장 내 중소마트에서 산 프랑스 와인 'Lady'와, 고기만두 1인분, 누구는 치즈라고 취급하지도 않는 12개 묶음 햄버거용 치즈를 차려놓고 혼술 하기 전에도 그랬다. 내겐 이 말이 자연스럽다. 자연스럽고 기꺼운 마음이 좋은 것 같다. 잘 고른 영화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라는 이 한 마디는 그렇게 내 일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