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과 주연

by 박태신

작년까지 두 달에 한 번씩 와인을 공부하고 시음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소박하지만 고즈넉한 장소를 빌리고, 와인과 안주는 회원들이 발품과 손품을 들여 준비했다. 덕분에 저렴한 회비로 다양한 중저가의 와인과 넉넉한 안주를 즐길 수 있었다.


한 병씩 새 와인이 소개될 때마다 맛과 향이 어떤지 기대한다. 전 세계의 와인이 우리를 찾아온다. 덕분에 우리는 와인으로 세계여행을 한다. 전 세계 곳곳 심지어 한반도에서 둥근 지구 맞은편에 있는 나라도 앉아서 여행한다. 더 특별한 것은 그 나라의 도심지나 관광명소에서 많이 떨어진 대지의 흙을 만난다는 점이다. 농부의 땀이 배고, 일하다 다쳐 흘린 피가 고여 굳은 흙이다. 그렇게 사람의 흔적과 그 지역 흙 속에 퍼져 있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 포도나무를 만난다. 그 포도나무가 계절을 보태고 보태 맺은 포도 알갱이를 만난다. 그냥 만나는 게 아니다. 흙 밖에서 영근 포도 알갱이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으깨어지고서 어두운 지하 창고 속 오크통에 들어간다. 발로 으깨어지든 기계로 으깨어지든, 스테인리스 통에 담기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담긴 와인은 오랜 시간을 보내며 성숙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와 만난다.


그런데 와인 잔이 없으면 영화에서처럼 병나발 불어야 할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종이컵이나 물컵을 사용하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품격, 제격과 같은 ‘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와인은 와인 잔에! 식탁에 있다가 사람 입술을 만나고 입속을 들여다보는 와인 잔은 두 시간 동안 시시때때로 자신을 매만지는 주인장을 관상 보듯 지켜볼 것이다. 손의 촉감, 체온, 건조한 입술, 입 냄새,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눈매까지 경험할 것이다. 와인과 사람의 가교 역할을 하는 와인 잔은 매력적인 몸 곡선을 지녔지만 까딱하면 부서지기 쉬운 앙상한 뼈대를 지닌 존재다. 그 연약함 덕분에 와인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 매번 와인 잔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오늘같이 푸른 하늘에 풍성하게 수놓아진 뭉게구름이 주연이라면 보이지 않는 바람은 조연에 해당할 것이다. 바람이 없다면 구름은 그저 정물화에 불과하다. 바람 덕분에 구름은 둥실둥실 흘러간다. 흩뿌려지면서 숨겨 놓은 태양을 내비치기도 한다. 구름끼리 율동적으로 포개지기도 한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와인은 와인 모임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주연이다. 그런 와인에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부여하는 것이 와인 잔이다. 와인 잔을 거쳐야 와인은 자신의 맛과 향, 빛깔, 투명도, 점성을 제대로 자랑할 수 있다. 없으면 허전한 조연이다.

오늘 아름다운 구름들의 행진을 보았는데 오후 늦게 다시 나가 보니 대청소한 듯 구름이 다 사라졌다. 바람이 거셌기 때문이다. 이런! 조연이 너무 설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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