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정선아리랑열차
만석이 되기 전 마지막 남은 창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코레일톡’ 앱을 통한 예약이었다. 마감 직전에 창가 자리가 비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토요일 아침 ‘정선아리랑열차’를 탔다.
나는 구석을 좋아한다. 일종의 구석인 창가 자리는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창밖 풍경을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점이 제일 크다. 오래전 놓인 철도는 ‘금싸라기 풍경’의 땅을 지나가기에 그 위를 달리는 열차의 구석 자리는 시선의 격이 높다. 나는 왕복 열차여행일 경우 되도록 오른쪽 창가를 선택한다. 한쪽 좌석을 고수하면 갈 때와 되돌아올 때 창밖으로 양방향 풍경을 다 맛볼 수 있어서다.
빛이 잘 들어와 수월하게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정선아리랑열차’에는 좌석별 조명 장치가 없다. 그래서 터널을 지나갈 때는 잠시 독서를 중단해야 한다. 그래도 청량리에서 정선까지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충분하다.
또한 태백선과 중앙선 갈림길 직전의 제천역과 그 다음 영월역을 지나면서부터는 많이 느리게 간다. 독서에 수월한 요건. 그러나 자꾸만 창밖 풍경이 내 시선을 책에서 자기 쪽으로 이끈다. 겨울이라 산과 들이 변변찮은 옷차림 행색이지만 하늘, 구름, 강, 맨몸으로 곧추 선 산나무들이 내 고개를 잡아당기는 힘은 아주 세다.
구석의 창 아래 모퉁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나는 이곳에 에스프레소 캔커피, 생수 병, 휴대폰, 수첩과 펜을 올려놓는다. 덕분에 내 여행 소품들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웅크릴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마음이 울적해 웅크리고 싶은 사람은 구석을 찾는 법이다. 밤열차라 창밖 어둠이 가시거리를 그루터기 키만큼 줄여 놓을 때, 피곤이 얼굴 주위를 감싸 생각이 가래떡처럼 잘릴 때 내 몸은 웅크린다.
내가 탄 4호차 객차 앞은 바로 기관차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디젤 기관차다. 디젤 기관차가 연기를 뿜어내며 움직여야 뒤의 객차들이 따라 움직인다. 나는 노선 중간중간 경유지 역에서 디젤 기관차가 다시 출발할 때 그 부드러운 이끎에 감탄했다. 쿵쾅거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리 없이 천천히 네 량의 객차를 이끌었고, 그때 그 ‘육중한’ 몸집 기관차의 ‘유연한’ 움직임에 감탄했다. 맨 앞 객차라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주 타 본 이 열차에서 나는 이제야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 열차 안 ‘휴게실’. 4호차 앞문 너머 그리고 1호차 뒷문 너머에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동색 벤치도 있어 대화를 나누고 너른 창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공간의 진미는 앞쪽 세로로 길게 나 있는 창 너머로 바로 앞 기관차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견인돼 가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느 부부가 아이 둘을 그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나도 아이가 된 기분으로 그곳에 들어가 신기한 장면들을 보았다. 객차 좌석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입체적 승차 기분을 맛보았다. 열차는 수없이 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지나간다. 빠름과 폐쇄감이 기본인 고속열차와 달리, 복선 구간을 지나 단선 위를 달리는 아리랑열차는 느림의 속도 완급 조절이 기본이다. 마주 오는 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 간이역의 짧은 복선 철로에서 멈춰 서는 일은 필수적이다.
게다가 이 아리랑열차의 휴게실은 앞쪽의 세 개 창과 더불어, 측면으로 지붕 바로 밑까지 넓게 트인 창을 지녔다. 개방적이다. 나는 이 휴게실을 오직 창밖 풍경을 보기 위해 자주 들락거렸다.
정선아리랑열차는 주말과 정선5일장이 있는(날짜 끝이 2일과 7일인) 날에만 운영한다. 아침에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정선역과 아우라지역까지 갔다가 저녁에 청량리역으로 되돌아온다. 하루 한 번 왕복 운행하는, 네 개의 객차가 전부 특실인 관광열차. 그래서 ‘새마을호’급 요금의 존재감을 지닌 완행열차.
나는 토요일 청량리역에서 출발할 때는 정선역에서 하차했다. 정선을 둘러보고 다음날 일요일 저녁 청량리역으로 출발할 때는 아우라지역에서 탑승했다. 열차는 종일 아우라지역에서 휴식을 취한다. 나도 출발 전까지 역 주변을 산책하고 아우라지 처녀상도 만났다.
4호차 휴게실의 묘미는 이때도 발휘된다. 기관차는 4호차에서 떨어져 나와 뒤쪽 1호차와 연결된 상태. 1호차가 선두가 된다. 출발 후 잠시 뒤, 이제 끝자리에 위치한 4호차의 휴게실은 정선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어제 내린 정선역이 멀어져 간다. 저 멀리 깜박이는 붉은 등은 후진하면 안 된다고, 지금 철로엔 내가 탄 열차가 존재한다고 알려주는 안전장치. 예전 역무원이 그랬듯 잘 가라 색깔로 인사하는 배웅 장치.
정선아리랑열차는 풍경화를 잔뜩 달고 달리는 갤러리다. 역무원이 없는, 또 없어 보이는 간이역 여러 곳을 애써 들렀다 가는 우직한 파수꾼이다. 도심과 시골, 평지와 산꼭대기, 들썩이는 저잣거리와 외진 들녘을 다닐 줄 아는 나그네다. 덕분에 나는 느닷없는 추억을 한아름 안고 또 하나의 구석인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