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태신 Apr 05. 2023

문학자판기

1. 독서 여행

두 건의 검토서 제출 마감 전날이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10여 일 동안 책상 앞에서만 있자니 좀이 쑤셨다. 멋진 상상을 했다. 책을 읽으며 여행을 떠난다면 어떨까? 일종의 독서 여행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차여행이 필수적이다. 고속버스 안에서는 눈이 금방 피로해져 책을 볼 수가 없다. 지난 토요일, 오전을 그렇게 고민하다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일 즉흥 결정이 내 여행 방식이다. 서둘러 이미 끝낸 검토서 하나를 보냈다.      


목적지를 어디로 할까 하다 영월과 안동이 떠올랐다. ‘코레일톡’ 앱으로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열차 시간표를 조회해 보았다. 토요일 정오 때니 당연히 좌석이 매진되거나 입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안동행 두 시 열차에 ‘입석-좌석’ 좌석 표시가 ‘곧 매진’을 뜻하는 모래시계 이모티콘과 함께 보였다. 원주까지는 입석이고 그다음엔 좌석이 정해져 있는 영특한 열차표이다. 앱으로 예매를 하고 급하게 여행 채비를 했다.      


그런데 선결 조건이 하나 갖추어져야 했다. 늦게까지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알아두는 것이 그것이었다. 검색해 보니 안동도서관이 제격이었다. 타지 사람이 정보열람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지는 가봐야 알 수 있다. 내 노트북은 구형인 데다 무게가 많이 나가서 외출을 할 수가 없다.      


회전마개가 달린 캔커피와 생수를 사고 열차에 탑승했다. 출발 5분 전이었다! 입석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빈자리가 있어 꿰차고 앉아 바로 독서 준비를 했다. 나의 이번 열차 독서는 프랑스 소설 원서 본문을 가능하면 많이 읽으며 요약하는 것이니 책상 앞에서의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KTX-이음 열차라 간이 받침대도 있고 와이파이도 잘 된다. 프린트 제본한 원서를 휴대폰 네이버 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노트에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그래도 여행이니 창밖으로 남한강과, 녹색이 부위를 넓혀가는 산야를 틈틈이 내다보곤 했다. 방에서 해방돼 여행객들과 섞여 자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 이동을 하니 마음이 설렜다. 그렇게 안동역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시간을 보냈다.           



2. 서원과 도서관

안동도서관은 안동역에서 버스로 15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너른 마당과 넓은 하늘이 있는 곳이었다. ‘굽’이라는 글자의 납작한 ‘ㄱ’ 자 모양을 한 단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컴퓨터 사용 여부부터 확인했다. 가능했다. 이용객이 거의 없어 연장해서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문 닫을 시간이라 오늘은 일반 열람실에서 독서와 메모를 이어갔다. 중간고사 한참 전이라 한산한 이곳은 작업하기 더없이 편하고 여유로웠다. 


복도 벽면에 도산서원 대형 액자 사진이 걸려 있는데, 과장일지 모르겠으나 안동도서관에서는 예전 서원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분적으로 찍은 위 사진에 도산서원의 ‘서광명실’과 ‘동광명실’이 보인다.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곳이다. 습기로부터 서책을 보호하기 위해 누각 형태로 지었다. 나는 안동도서관이라는 서원에서 하루 이틀 유숙하며 퇴계 선생의 강의를 듣는 유생이 되었다. 일요일까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도산서원을 들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3. 산책

저녁식사도 하고 산책도 할 겸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한적하고 운치 있는 골목을 발견했다. 200미터쯤 직선으로 뻗은 길이 시원시원했다. 단독주택들의 멋이 살아 있는 골목이었다. 흥미롭게도 ‘배움길’이라는 도로명을 달고 있었다. 서쪽으로 난 측면 골목으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골목길, 집, 전깃줄과 어울린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쭉 가다 보니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벽화엔 편지를 보내는 일과 연관된 것들이 많았다. 골목 끝 왼쪽 담 너머로 안동우체국이 있었던 것이다. 키 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꼬마소녀를 그린 앙증맞은 그림이 우체국 건물과 조화를 이루었다. 배움길 골목은 그렇게 생기가 돋아 있었다.     



     

4. 문학자판기

다음날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일요일 아침이라 문을 연 식당이 없어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오전엔 일반열람실에서, 오후엔 정보열람실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틈틈이 마당으로 나와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정보열람실이 문을 닫는 5시, 그 시각 20분 전에 검토서를 에이전시에 메일로 제출할 수 있었다. 뿌듯했다. 이걸로 여행이 끝나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말을 보낸 안동도서관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도서관 1층엔 특이한 것이 있었다. ‘문학자판기’가 그것이다. 신기해하면서 화면을 터치하니 ‘오늘의 명언’이 프린트돼 스르르 튀어나왔다. 토요일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 일요일엔 에드워드 기번의 명언 “바람과 파도는 항상 가장 유능한 항해자의 편에 선다.”가 나왔다. 화면에 쓰여 있듯이 그야말로 ‘글 조각 선물’이다. 자판기 천국인 일본에서도 이런 자판기는 없을 것이다.      


내게 보람을 안겨준 도서관을 뒤로하고 근처 낙동강을 찾았다. 느티나무가 쭉 심어져 있는 수변산책길을 걸었다. 전날과 다른 앞 배경으로 따갑지 않은 해가 지고 있었다. 주말을 마감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여행을 끝내야 할까? 그럴 수 없다. 먼길을 왔는데……푹 휴식을 취하고 어디든 들러야 한다. 다음 글에서 안동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계속 저를 따라 오시길…… 



작가의 이전글 연하디 연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