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한 색과 여림과 비어 있음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경험을 한껏 했다. 4월 10일 봄날, 경남 함양의 상림공원(상림숲)에서다. 신라시대 때 홍수 예방을 위해 최치원 선생이 조성한 인공 숲인데, 연륜이 1000년쯤 되면 ‘인공’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진다.
오롯이 평지인 상림공원은 서울서 세 시간 넘게 달려온 상춘객을 미적거리게 했다. 우선 햇빛을 피해 급하게 응달을 찾지 않아도 된다. 층층나무, 개서어나무, 나도밤나무 들이 연두색 잎을 단 가지들로 아치 궁륭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앙상한 가지에 적은 수의 잎들이다. 그리고 연두다. 무성했다면 덜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림과 빈약함 덕분에 푸른 하늘 아래 제 윤곽과 속살을 훤히 보여주는 연두 잎을 정면으로 보거나 올려다보느라 몇 번을 멈춰 섰는지 모른다.
서로 얽히지 않으려 최대한 간격을 유지하며 뻗어가는 가지 덕분에 잎들의 충돌은 드물다. 높이 때문에 잎과 잎이 겹칠 때는 내가 좋아하는 잎그림자가, 호수 수면 위 동심원들처럼 무수하게 겹쳐 등장한다. 시시때때로 서글서글한 바람이 위쪽 잎이 햇빛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가지를 살살 흔들어댄다. 나로서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경우가 드문 상림숲의 연두 잎들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고 자라는 건강한 아이들 같다.
무논
숨 가쁘게 오르내릴 언덕도 없다. 직선과 곡선의 무장애 산책로가 세 군데 그러니까 길쭉한 타원형 숲 양쪽 둘레와 한가운데에 길게 이어져 있다. 그 세 산책로 중 한 곳을 걷다가 중간중간 이탈해 다른 산책로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도로변 숲길 시작점에서 오른쪽 산책로 따라 종착점 물레방아 방앗간까지 갔다가, 돌아올 땐 나머지 두 길을 교차하며 돌아오곤 했다.
산책로 바닥에 피어 있는 풀들 앞에선 저절로 주저앉는다. 자잘한 이끼, 잘린 나뭇가지, 민들레, 개불알꽃, 현호색이 작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키만 작을 뿐 이곳도 엄연한 숲의 일부다.
원앙 한 쌍이 오른쪽 산책로 옆 연꽃 단지 뭍에 와 있다. 산보객들과는 불과 1미터 남짓 거리. 아무리 사진을 찍어대도 겁낼 이유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 암컷은 뭍에 올라와 있고 수컷은 암컷 주위 물가에서 자맥질한다. 뭍에 올라 암컷 옆에서 보호본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참 지나서야 둘은 물가 한가운데로 헤엄쳐 가는 모습을 덤으로 보여주었다.
무논을 보았다. 비가 안 온 지 오래됐는데도 물이 넘치도록 가득하다. 모내기를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다. 가마니로 뒤덮인 논두렁도 걸어보았다. 시골에서 산 적이 없는 나는 봄날의 무논을 근처에서 본 적이 거의 없다. 흙탕물이지만 넉넉해 보였다. 나무와 야산 그림자까지 품에 안고 있다. 거기다 무논 속 중창단 규모의 개구리들 합창 소리는 또 어떻고. 봄날의 상림숲은 처음이라 이 무논이 유독 인상 깊었다.
이렇게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들은 논물이 되고, 산책로 옆 도랑 속에서 컨베이어 벨트 물줄기가 되고, 꼭지를 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뿜어 나오는 상림 약숫물이 되고, 함양의 대표적 하천인 위천의 강물이 된다.
꽃비와 벤치
곳곳에 배치된 상림공원의 벤치들은 인간친화형이다. 등받이가 있든 없든 차단을 연상케 하는 낮은 턱의 칸막이가 설치된 벤치는 하나도 없다. 덕분에 연인과 가족이 옆구리를 붙여 앉거나 바짝 어깨에 기댈 수 있다. 상림숲에서는 산책과 휴식에 장애를 받는 느낌, 긴장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끔씩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전투기가 굉음을 내는 것만 빼고.
벚나무가 가지를 흔들어 끝물 꽃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꽃비는 배낭에 챙겨 온 접이우산을 떠올리지 않게 하는 비다. 햇빛을 한껏 받으며 숲 산책로나 제방 산책로에 자리 잡은 벚나무는 새와 곤충뿐 아니라 상춘객도 반기는 듯싶다. 벚나무는 몸의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화려한 군무’라는 역할을 다한 꽃잎을 바람에 떨굴 줄 안다. 봄기운의 은근한 압력이 느껴진다.
걸으며 바닥에 주저앉으며 벤치에 앉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고 정리했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복잡한 생각을 단조롭게 만들기 위해 이곳에 들르곤 했다. 함양읍이 바로 옆이라 숙식 문제는 읍내에서 모두 해결하고 상림공원에서는 오직 숲과 나만 바라본다.
맨발
이번에 갔을 땐 안 하던 짓을 했다. ‘천년 숲길’이라 불리는 숲 가운데 산책로는 맨발 걷기를 권장하는 길이다. 신발 신고 걷다가 문득 발바닥이라는 미각 기관으로 ‘흙맛’을 맛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는 행위는 험지와 외진 곳을 걷는 것에 익숙한 내게 무척 낯선 행위다. 숲 사방에 펼쳐진 연두 잎들과, 숲이 우거지기 전의 연한 기운이 내게 힘을 준 것 같다.
내 발바닥은 살짝 차가움에 움찔하다가 이내 시원함을 느꼈다. 다져진 흙뿐 아니라 모래도 밟고 자잘한 나뭇가지도 밟았다. 과자를 처음 씹을 때의 꺼끌꺼끌함이 느껴지다가도 이내 과자 부스러기가 녹아들 듯이 발은 평온해졌다. 신발을 들고 맨발로 숲 한가운데를 걷는 내 모습이 기특해 보였다.
맨발로 걸으면 천천히 걷게 된다. 맨발로 걷다 보니 주변에 나처럼 맨발로 걷는 산보객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양말과 신발이라는 보호막이자 굴레 속에서, 노상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만 살았던 내 발은 지구와 민낯으로 살을 대했다. 그렇게 나는 하늘 위 우주가 아니라 발아래 우주를 만났다.
비어 있음
숲속에서 나는 유독 한 나무 잎을 눈여겨보았다. 나도밤나무 잎 또는 개서어나무 잎인 듯한데 연두 잎인 것은 물론이고 잎들이 축 늘어진 모습에 왜 그런지 애정이 갔다. 봄이어서 그런지 곤두서지도 옆으로 평행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빛이 덜 들어오는 숲속의 생리에 맞춘 여린 기운 때문일까.
나는 맨발로 걸으면서 숲의 빈 공간을 실컷 보았다. 답답함을 모르겠다. 빈 공간이 많기에 바닥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더 많은 빛을 받을 수 있다. 여름과 가을이 되면 바닥 식물들도 중심 나무들도 쑥쑥 자라고 몸짓을 불러 빽빽해지겠지만, 지금 봄날의 그 비어 있음이 마냥 좋았다. 여백이 많은 그림과는 다른 느낌이다. 따가움이 걸러진 순한 햇빛, 연두라는 여린 색, 연한 가지가 맑고 투명한 세상을 만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왔다. 드디어 오늘 비가 내렸다. 빗물을 흡수하면서 숲은 1년을 버틸 힘을 차근차근 축적해 나갈 것이다. 연두 잎, 무논, 맨발의 흙바닥, 넉넉한 벤치 등등 봄날의 미덕이 가득한 상림숲은 내게 잊지 못할 추억을 갖게 해주었다. 내 마음에도 결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