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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망 Mar 29. 2023

12. 네가 먼저 걸었으니 앞서 가는게 옳다

경북 영주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챕터12

#12 네가 먼저 걸었으니 앞서 가는게 옳다


평화롭던 영주 <후생시장>의 정돈된 모습



영주다, 영주에 도착했다. 영주가 반가운 이유는 명절마다 방문하는 할머니 댁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제 영주만 지나면 드디어 강원도로 떠나기 때문이다. 살면서 군 시절을 제외하고 강원도를 가본 적이 있었던가…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가지만, 아직 경상도를 벗어나지 못한 내가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도시가 우리 할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사실은 꽤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영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친척들, 심지어 친하게 지내는 사촌 형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안부 인사라도 전해드렸으면 좋으련만, 그 때의 나는 조금 더 자유롭게 여행객으로써 영주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영주는 노후화된 곳이 많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도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걷다가 발견한 중앙시장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상점들을 볼 수 있었고, 바로 옆의 후생시장 역시 단정하게 사람들을 맞이하려는 모습들이 보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 활성화가 되지는 않았는지 지금 같은 비수기에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랄까? 그래도 잘 정돈된 길들과 서로 높이를 맞추고 있는 건물들, 깔끔하게 정리된 골목을 보니 이제 사람만 복작거리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주 <태극당> 카스테라 인절미!!



가는 길에 배가 고파 식사를 하기로 했다.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니 가능한 못 먹어본 음식, 쉽게 먹을 수 없는 지역 음식을 찾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근처에 하얀 국물의 맛있는 감자탕 집이 있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뛰어갔지만, 하필 금일 휴업이란다. 아쉽지만 곧바로 다른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앞에 있는 유명한 빵집인 <태극당>에 들려서 시그니처 메뉴인 카스테라 인절미를 먹었다.


포슬포슬하면서 쫀득한 떡이 입안에서 뒤섞인다. 솔직히 나는 완전한 한식파(밥!!)이기 때문에 크게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맛있었다. 빵과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집어먹을 수 있을 법한 맛이다. 적당히 배를 채웠으니 다시 길을 떠나본다.



동네에서 만난 <할매묵공장>



아까 본 도시재생사업이 마음에 들어 그냥 고즈넉한 동네를 구경한다고 생각하고 구성마을로 향했다. 이곳도 영주시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인데 젊은 인구가 별로 유입되지 않고 노인 인구가 많은 곳이다 보니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곳들이 보였다. <할매묵공장>, <할배목공소>. 귀여운 이름과 깔끔한 건물들을 구경하다 마을 초입에 있는 <소담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아메리카노 1500원. 착한 가격에 서둘러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카페 안에 코인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었다! 할머니 두 분이 운영하고 계신 이곳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주문하고 여태 쌓였던 빨래까지 한방에 해치우기로 했다. 게다가 다음 목적지인 <부석사>에 가는 길이 인터넷으로 아무리 검색해 봐도 헷갈려서 끙끙대고 있었는데 주인 할머니께서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가끔 이렇게 나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행운이 내게 올 때면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동네에서 만난 소박하고 평화로운 풍경들



부석사행 버스 시간은 2시간가량 남았고 맡긴 빨래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무거운 가방은 잠시 맡기고 카페를 나섰다. 내 손에는 시원한 커피가 들려있고, 하늘은 맑고 푸르며, 바람은 적당할 때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간다. 여행을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있을까? 아직은 조금 더운 10월의 맑은 하늘 밑에서 커피를 쪽쪽 빨며 마치 동네 주민처럼 골목골목을 쏘다녔다.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동네가 조용했지만, 그 모습이 참 편안해 보였다. 원래 있어야 하는 것들이 그 자리에 있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그런 당연한 풍경들이 가끔은 특별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원래대로라면 차가 지나다니기 바빠야 할, 골목이라 하기에는 넓고 도로라고 하기에는 좁은 길을 당당하게 중앙으로 워킹한다. 계속 그 길을 당당하게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차가 많은 도시에서 자란 버릇이다. 내가 걷는 길을 계속 뒤돌아보는 것. 그런데 정말로 내 뒤에 차가 있었다. 깜짝 놀라서 옆으로 비켜섰는데 생각해보니 이 길은 따로 빠지는 길 없이 꽤 긴 직선 구간이었고 나는 그 길을 절반쯤 걸어왔다. 그렇다는 것은 차가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는 거다.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서. 자기가 먼저 가야 한다고 경적을 누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온 것이다. 내가 이 길을 먼저 걷고 있으니 앞서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옆으로 비켜서자 창문을 내리고 비켜줘서 고맙다는 미소와 함께 가벼운 묵례를 전하셨던 노신사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부석사는 누하진입 형태로 되어 있어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야 한다. 



작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구석구석 골목길을 탐험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1시간을 조금 넘겨 다시 도착한 카페에는 뽀송하게 건조까지 마친 빨래가 깔끔하게 개어져 가방에 들어가 있었다. 주인 할머니께서 세탁이 다 된 옷을 시간에 맞추어 건조기에 넣고 다시 빼서 개어 가방에 넣어주신 것이다. 사소하지만 깊은 정성에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따뜻하게 온기가 들어간 가방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한 버스를 타고 드디어 부석사로 향했다. 여기서 한 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지만 버스를 타고 가며 보이는 바깥 풍경이 참 예뻤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절에 도착했다. 여느 절이 그렇듯 부석사도 상당히 경사가 높은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부석사는 누하진입* 형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계단을 올라서 고개를 들면 비로소 웅장한 절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묵직한 가방을 등에 메고 올라왔더니 땀에 흠뻑 젖었지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다.



<부석사>의 전경



아름답다. 참으로 아름답다. 가을의 부석사는 정말 아름답구나. 하늘은 너무 파란데 그와 대조되게 산은 녹색으로 푸르다. 곳곳에 빨갛게 노랗게 물들고 있는 볼터치들은 산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멍하게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전화기를 꺼내 엄마에게 영상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잘 지내고 있어?” 여전히 엄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보다 내가 잘 지내는지가 먼저인가 보다. 옆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 잠시 아빠를 바꿔 달라고 했다. 영상으로나마 눈 앞에 있는 파란 하늘과 산을 보여주는데 그런 건 아빠 눈에 안 들어오나 보다. 26살이나 먹은 아들이 국내여행에서 고생하면 얼마나 한다고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질문을 쏟아낸다. 그래, 내가 졌다. 아무래도 엄마 아빠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보다, 알록달록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산보다 그냥 아들 얼굴이 더 보고 싶은 모양이다. 하늘을 비추던 카메라를 돌려 내 얼굴이 향하게 놔두었다. 엄마 아빠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올라갈 때는 목표를 바라보며 걸어서 그런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10kg이 넘는 가방을 지고 가파른 경사를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고통을 잊는 법을 알고 있다. 하하. 부석사는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사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 막 따온 사과를 파는 할머니들은 높은 경사에 놓인 부석사를 다녀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시원한 사과즙이 1팩에 1,000원! 아, 이 유혹을 어떻게 떨칠 수 있으랴. 나는 홀린 듯 지갑을 꺼내 사과즙을 구입했다. 그 자리에서 먹기 좋게 잘라주시는 사과즙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원샷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맛의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과 피로가 쏙 들어가는 맛이다. 파란 하늘도, 예뻤던 산도, 시원했던 바람도 다 좋았지만 결국 이 사과즙 맛을 잊지 못해 나는 다시 부석사에 오를 것 같다. ✈



*누하진입 :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천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어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갈 때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작가 본계정 인스타 (@smg_dm)

쪼렙여행자 인스타 (@jjolevel_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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