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고 머리야… 언제 상화 집에 들어왔는지, 몇 시에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피곤한 상태에서 분위기에 취해 들이부은 술을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계속 마신 탓이다. 몰려오는 두통에 잠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드러누웠다. 원래 술을 마시고 난 뒤에도 숙취가 없다는 상화는 내가 머리를 감싸고 누워있는 동안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렇게 안동까지 찾아왔는데 오늘은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나서는 상화에게 차마 움직이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원망과 고마움이 8:2로 나누어 담긴 표정으로 뭉그적뭉그적 따라나섰다.
렌터카까지 빌린 상화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에서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안동에서의 첫번째 목적지는 여행 목표였던 [세계문화유산 지정 7개 사찰 방문하기] 중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될 안동 <봉정사>이다. 봉정사는 추석에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 댁에 가기 전 잠시 들렸던 곳이라 감회가 더욱 새롭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2주 뒤에 다시 봉정사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더니 대놓고 비웃었던 아빠의 얼굴을... 물론 지금 몸 상태는 엉망이지만 스스로 한 말을 지켰다는 사실은 꽤 큰 성취감을 들게 해주었다.
분명 같은 장소이지만 누구와 왔는지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가족들과 왔을 때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고 건물과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오래된 친구와 방문하니 서로 가볍게 말을 건네지 않고 서성거리며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낡은 목제 기둥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친구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해본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이제 갈까?라는 담백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간결하게 답한 뒤 우리는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 내려왔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괜찮네.”라고 중얼거리는 상화의 한마디에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씨익 웃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자동차가 있으니 정말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걷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지금 내가 도보여행을 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지만, 한 번 자동차를 타게 되면 그 편안함에 도취되어 도보여행의 목적을 잊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 걱정 했던 시간이 민망할 정도로 이미 편안함에 도취된 나는 상화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15분 정도 차를 타고 달려간 두 번째 목적지는 상화가 청와대보다 으리으리하니 놀라지 말라고 했던 <경상북도 신청사>이다. 규모를 보고 한번 놀라고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신도시의 풍경에 두 번 놀랐다. 버스 정류장조차 없어서 버스로 이동했다면 오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압도적인 규모에 놀란 것도 잠시, 아직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도시의 모습에 흥미를 잃고는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 목적지는 <병산서원>이다. 서둘러 움직여 겨우 도착한 서원은 곧 폐장 시간이 될 예정이었다. 만약 누가 병산서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아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우리가 병산서원에 도착했던 10월의 무르익은 가을의 오후 5시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직 어둠이 오기 전 그날의 일을 마친 해가 마지막으로 붉은빛을 거두고 노랗게 물들 때쯤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순간은 정말 아름다웠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마루에 쪼르르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던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아 좋다…”고 중얼거리며 그렇게 한참 동안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내 기사가 되어 주었던 상화는 다음 목적지인 영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바로 떠나야 했던 상화는 딱 두 마디를 남겼다.
“잘 가래이. 창원에서 보자.”
그래, 그 두 마디면 되었다. 굳이 끌어안지 않아도, 간지러운 말을 안 해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도시도 결국은 사람에 의해 기억된다. 그렇게 안동은 나에게 조금 심심하지만 깊은 맛이 있는, 곱씹을수록 가슴이 찡해지는 그런 도시가 되었다.
상화와 헤어진 후 영주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깨끗하게 씻은 뒤 누워서 오늘 촬영한 사진을 보았다. 바쁘게 돌아다닌 거에 비해 찍은 사진이 별로 없었다. ‘하긴 오늘 컨디션이 영 안 좋긴 했지.’ 반나절을 고생한 두통을 생각하니 오싹했다. 그래도 천혜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나름의 구도로 잡고 예쁘게 찍은 사진들을 쓱쓱 넘기다가 한 사진에서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빛도 번지고 구도도 이상한, 그야말로 제멋대로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쉽게 다음 사진으로 넘길 수 없는 그 사진에는 오늘 온종일 나와 함께 있어 준 상화의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혀있었다. ✈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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