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숙고는 고민할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러닝화를 하나 샀다. 러닝화가 담긴 박스에는 혹시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에 반품을 할 수 있도록 설명이 적힌 반품 신청서가 함께 들어있었다. 신청서를 쓱 읽어보고는 바로 버려버릴까 하다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너무 덥고 습한 날씨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가 반복되는 날을 핑계로 러닝화를 신어보지도 못하고 3일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반품 신청서는 계속 내 책상에 올려져 있었고, 책상을 써야 할 때 계속 걸리적거리는 종이를 오른쪽 왼쪽으로 치우기만 했다. 오늘도 역시나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 걸리적거리는 신청서를 치우기 위해 손을 뻗다가 문득, 그냥 한번 실내에서라도 신발을 신어보면 될 것 가지고 이게 뭐 하고 있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노트에는 내가 가졌던 수많은 아이디어와 글들이 각양각색의 볼펜들로 적혀있다. 이렇게 적어놓으면 언젠가 쓸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그리고 생각했을 당시 정말 괜찮은 생각이라고 여겨졌던 그 글들은 여전히 단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잊히고 있다. 어쩌면 내가 지금껏 심사숙고하며 아껴두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은 사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반품 신청서들을 계속 쌓아두기만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종이에 담긴 내용을 누군가한테 밝히고 알려야 보관해야 할지, 폐기해야 할지, 내용을 더해서 책으로 만들어야 할지가 결정이 날 텐데 말이다. 항상 스스로 위안하듯이 말하는 심사숙고 중이라는 것은 사실 두려움이다. 의미나 과정보다는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인 것이다. 어쩌면 내가 3일 동안이나 새 신발을 신어보지 않았던 것은, 혹시라도 반품을 해야 할 경우 골치 아파질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심사숙고는 걱정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되게끔 만드는 데 써야 한다.
짧은 생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양말을 신고, 러닝화를 신어보았다. 러닝화는 내 발에 딱 맞았고, 참 예뻤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예쁜 러닝화를 바라보다가 내 책상에 놓인 반품 신청서를 집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이제는 이 신발을 반품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옷장에서 양말을 꺼내 신고, 새 신발을 꺼내어 신어보았을 뿐이고 그 덕분에 3일 동안 내 책상에서 나를 귀찮게 하던 종이를 치워버릴 수 있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아주 약간의 결심과 3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다.
문득 깨달은 심사숙고에 대한 생각을 기억하고 싶어서 옆에 있는 노트에 급하게 글을 휘갈겨 적었다. 여태껏 이렇게 노트에 끄적거리고는 그대로 방치한 글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번에 얻은 교훈을 바로 적용하기 위해 이부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 취침시간이 더 늦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브런치로 글을 다시 한번 정돈했다. 이제 이 글은 좋은 평가를 받든 나쁜 평가를 받든 여러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 평가들을 본 이후에 나는 심사숙고를 할 것이다. 더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자주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을. 심사숙고는 걱정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때 해야 한다는 것. 평생 잊지 못할 가르침을 3일 동안 버리지 못한 반품 신청서를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