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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Sep 16. 2021

운 좋은 지난날이 고맙다

얼마 전 안과 검진을 받았다.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는 선배 한 분이 녹내장으로 양쪽 눈이 거의 실명 단계에 이르렀다면서 안과 검진을 강권하다시피 했다.

“시력이 1.0으로 나왔네요. 아주 좋으십니다. 백내장이나 녹내장 징후도 없고 황반변성도 없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시력검사에서는 시력이 늘 1.0 이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은 사람은 멀리 푸른 산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고 했다. 초록색이 눈을 좋게 만든다고 하면서. 선생님 말씀을 잘 듣던 때라 먼 산과 푸른 나무를  보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나무가 지금처럼 울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이나 집 주변에는 나무가 많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주변에 안경을 쓴 친구들이 늘어 갔지만 내 시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눈이 아직까지 나빠지지 않은 것이 고맙다. 책을 맘껏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은 것이  고맙다. 몸 아픈 곳이 없고 먹어야 할 약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 또한 고마운 일이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병치레를 하지는 않았지만 또래들보다 키가 작았고 마른 편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았다. 키 큰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렇지만 거의 아프지는 않아 학교에 결석이나 조퇴를 할 일은 없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은 각별했다. 할머니는 좋은 것, 맛난 것은 주로 내게 주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모두가 한여름에 꽁보리밥만 먹었지만 할머니 밥은 늘 하얀 쌀밥이었다. 그 맛있는 쌀밥을 할머니는 늘 반은 남겨 내게 주었다. 그 쌀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기 위해서는 내 보리밥은 천천히 먹어야 했다. 그 보리밥을 천천히 먹던 습관이 밥을 빨리 먹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밥을 빨리 먹을 수 없다. 그 덕분에 지금껏 소화제 한 번 먹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몹시 엄격하셨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셨을 때가 아니면 우리 형제들에게 사랑 가득한 그윽한 눈길을 보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우리 아이들에게 매를 들거나 손찌검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늘 무섭고 두렵기만 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면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다.

반면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운 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온 집안을 휘저으며 온갖 장난질을 쳐도 꾸짖거나 혼 한 번 내지 않았다. 잔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할머니가 엉덩짝을 빗자루로 후려치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빗자루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는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는 면 소재지에 있었다. 추운 겨울날에는 학교 가는 일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그 먼 길을 6년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다녔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소꼴을 베러 들로 산으로 가야 했고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소를 끌고 산으로 가야 했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소를 몰고 산에 가면 소는 알아서 풀을 뜯어먹었기 때문에 산기슭에 이르기 무섭게 소는 내팽개치고 못으로 뛰어들기 바빴다. 그러다 감기에도 지치면 산그늘에 모여 온갖 장난질을 하며 놀았다. 방학 숙제는 할 틈이 없었다. 개학을 하방학 숙제가져가야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었다. 그러다 개학이 2~3일 앞으로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를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틈틈이 조금 풀다 만 방학책만 들고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선생님은 방학숙제를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 꼼꼼히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보다 숙제 검사를 모른체 넘어가는 선생님이 훨씬 존경스럽고 고마웠다.

겨울 방학은 더없이 좋았다. 소 풀이나 소 먹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논이나 저수지로 달려가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고 연을 날렸다. 제기차기,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공놀이, 땅따먹기, 어울려 놀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나무 총에 화약을 넣고 땅땅 쏘며 노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총은 각자가 재주껏 만들었다. 밤에는 골방에 모여 또래들끼리 화투를 치며 놀기도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아이는 없었다. 공부하란 말은 하지도 않았고 방학 내내 팽팽 놀기만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학년 말에 나눠주는 통지표는 거의 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공부 열심히 하란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공부를 잘할까 겁을 내는 아버지들도 있었다. 상급학교에 보내려면 돈도 돈이지만 일손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더 이상 자라지도 나이 들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긴장을 해야 했다. 때문에 늘 아버지가 출타하시기만 바랐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많아 출타를 하실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출타하시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완벽한 내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껏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참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은 맨 위 형님만 빼고 위로 여섯 형제를 내리 잃었다고 했다. 태어나 두세 살쯤 되어 홍역 같은 병을 2~3일 앓으면 끝이라 했다. 맨 위 형님 밑으로 그렇게 여섯을 모조리 잃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여섯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 형들, 누나들보다 더 어려운 전쟁 직후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밥 굶는 집이 많았던 시절임에도 밥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고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무서움이 청소년기에도 빗나가거나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친구들이 유혹을 하고 꼬드겨도 꿋꿋이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 얼굴 때문이었다. 먼 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고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높은 산을 헤매고 했던 것은 튼튼한 체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을 앓지 않은 것도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준 아버지가 계셨던 것 또한 참 운이 좋은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다고, 매일매일 시간 보내는 것이 고역이라는 친구들이 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늘 시간에 쫓기는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읽고 싶은 책이 많고 하고 싶은 것 또한 많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건강과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 또한 크게 고마와 할 일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경제관념이 부족했고 돈을 벌고 모으려는 노력을 악착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 청약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마음 편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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