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과 검진을 받았다.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는 선배 한 분이 녹내장으로 양쪽 눈이 거의 실명 단계에 이르렀다면서 안과 검진을 강권하다시피 했다.
“시력이 1.0으로 나왔네요. 아주 좋으십니다. 백내장이나 녹내장 징후도 없고 황반변성도 없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시력검사에서는 시력이 늘 1.0 이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은 사람은 멀리 푸른 산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고 했다. 초록색이 눈을 좋게 만든다고 하면서. 선생님 말씀을 잘 듣던 때라 먼 산과 푸른 나무를 보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나무가 지금처럼 울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산이나 집 주변에는 나무가 많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주변에 안경을 쓴 친구들이 늘어 갔지만 내 시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눈이 아직까지 나빠지지 않은 것이 고맙다. 책을 맘껏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은 것이 참 고맙다. 몸 아픈 곳이 없고 먹어야 할 약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 또한 고마운 일이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한 편이었다. 병치레를 하지는 않았지만 또래들보다 키가 작았고 마른 편이었다. 학교에서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았다. 키 큰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렇지만 거의 아프지는 않아 학교에 결석이나 조퇴를 할 일은 없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은 각별했다. 할머니는 좋은 것, 맛난 것은 주로 내게 주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모두가 한여름에 꽁보리밥만 먹었지만 할머니 밥은 늘 하얀 쌀밥이었다. 그 맛있는 쌀밥을 할머니는 늘 반은 남겨 내게 주었다. 그 쌀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기 위해서는 내 보리밥은 천천히 먹어야 했다. 그 보리밥을 천천히 먹던 습관이 밥을 빨리 먹을 수 없게 만들었는지 지금도 밥을 빨리 먹을 수 없다. 그 덕분에 지금껏 소화제 한 번 먹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몹시 엄격하셨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셨을 때가 아니면 우리 형제들에게 사랑 가득한 그윽한 눈길을 보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우리 아이들에게 매를 들거나 손찌검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늘 무섭고 두렵기만 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면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다.
반면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운 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온 집안을 휘저으며 온갖 장난질을 쳐도 꾸짖거나 혼 한 번 내지 않았다. 잔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할머니가 엉덩짝을 빗자루로 후려치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빗자루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는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는 면 소재지에 있었다. 추운 겨울날에는 학교 가는 일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그 먼 길을 6년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다녔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소꼴을 베러 들로 산으로 가야 했고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소를 끌고 산으로 가야 했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소를 몰고 산에 가면 소는 알아서 풀을 뜯어먹었기 때문에 산기슭에 이르기 무섭게 소는 내팽개치고 못으로 뛰어들기 바빴다. 그러다 멱 감기에도 지치면 산그늘에 모여 온갖 장난질을 하며 놀았다. 방학 숙제는 할 틈이 없었다. 개학을 하면 방학 숙제를 가져가야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었다. 그러다 개학이 2~3일 앞으로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를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틈틈이 조금 풀다 만 방학책만 들고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선생님은 방학숙제를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 꼼꼼히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보다 숙제 검사를 모른체 넘어가는 선생님이 훨씬 존경스럽고 고마웠다.
겨울 방학은 더없이 좋았다. 소 풀이나 소 먹일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논이나 저수지로 달려가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고 연을 날렸다. 제기차기,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공놀이, 땅따먹기, 어울려 놀 일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나무 총에 화약을 넣고 땅땅 쏘며 노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총은 각자가 재주껏 만들었다. 밤에는 골방에 모여 또래들끼리 화투를 치며 놀기도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아이는 없었다. 공부하란 말은 하지도 않았고 방학 내내 팽팽 놀기만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학년 말에 나눠주는 통지표는 거의 수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공부 열심히 하란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공부를 잘할까 겁을 내는 아버지들도 있었다. 상급학교에 보내려면 돈도 돈이지만 일손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더 이상 자라지도 나이 들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긴장을 해야 했다. 때문에 늘 아버지가 출타하시기만 바랐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많아 출타를 하실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출타하시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완벽한 내 세상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껏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참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님은 맨 위 형님만 빼고 위로 여섯 형제를 내리 잃었다고 했다. 태어나 두세 살쯤 되어 홍역 같은 병을 2~3일 앓으면 끝이라 했다. 맨 위 형님 밑으로 그렇게 여섯을 모조리 잃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여섯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 형들, 누나들보다 더 어려운 전쟁 직후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밥 굶는 집이 많았던 시절임에도 밥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이나,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고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무서움이 청소년기에도 빗나가거나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친구들이 유혹을 하고 꼬드겨도 꿋꿋이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떠오르는 아버지 얼굴 때문이었다. 먼 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고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높은 산을 헤매고 했던 것은 튼튼한 체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을 앓지 않은 것도 오로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준 아버지가 계셨던 것 또한 참 운이 좋은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루하다고, 매일매일 시간 보내는 것이 고역이라는 친구들이 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늘 시간에 쫓기는 내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읽고 싶은 책이 많고 하고 싶은 것 또한 많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건강과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를 가졌다는 것 또한 크게 고마와 할 일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그리 풍족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다. 경제관념이 부족했고 돈을 벌고 모으려는 노력을 악착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 청약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마음 편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