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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an 25. 2023

어머니

 삼(대마)은 한여름날 벤다. 찌는듯한 한여름이라도 삼밭에 들어가면 땀을 식힐 정도로 삼밭은 시원했다. 삼밭에 들어가면 밖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은 키가 컸다. 개울가에 땅을 파 만든 가마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삼을 찌면 그 이후 일들은 오롯이 어머니들 몫이었다. 삼 껍질을 벗기고 말리고 적당한 굵기로 쪼개고 하나하나 이어 붙여 실타래를 만들고 베를 짜는 것까지 이 모든 과정은 어머니들 담당이었다. 삼 껍질을 벗겨 실타래를 만들기까지는 이웃한 어머니들이 넓고 시원한 툇마루가 있는 집에 모여 함께 작업을 했다. 여름내 왁자하게 웃고 떠들면서 함께 하는 작업은 어머니들에게는 차라리 놀이였는지도 모른다.

 삼 삼기를 끝내면 어머니는 종일토록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고 할머니는 물레를 돌려 목화솜으로 만든 고치로 실을 자았다. 목화 실타래가 굵어지고 개수가 늘어나면 어머니의 일거리 또한 늘어나게 된다. 이 실로 또 베를 짜야하기 때문이다.

 정지(부엌)는 어머니의 주 일터였다. 여기서 어머니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다. 정지 구석 물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는 것도 어머니 몫이었다. 옷에 풀을 먹여 다리거나 다듬잇돌에 옷을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기고, 실을 짜서 만든 천으로 옷을 만들고 이불을 만드는 것도 어머니 몫이었다. 빨래는 수시로 해야 하는 일이면서 가장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비누나 세제가 없던 시절이라 밑이 뚫어진 콩나물시루 같은 데에 재를 가득 담고 물을 부어 그 물에 옷을 빨거나 끓는 물에 삶아야 했다. 물에 삶거나 잿물에 빤 빨래는 멀리 개울까지 머리에 이고 가서 다시 개울물에 헹궈야 했다. 겨울철에는 두터운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디딜방아로 고추를 빻고 설에는 쌀을 빻아 떡을 만들고 떡국을 만들었다. 여성의 연약한 다리로 끝없이 해야 하는 방아질은 정말 힘든 일이었겠지만 그것은 오롯이 여인들만의 일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방아질할 때 돕는답시고 방아다리에 발을 올려놓았다가 방아질 몇 번에 녹초가 되어 도망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은 무엇이나 맛있었다. 긴긴 겨울밤 가마솥에 넣어둔 밥을 꺼내와 시원한 깍두기나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고추장 항아리에 박아 둔 무 지나 고들빼기는 도시락 반찬으로 최고였다. 어머니는 무엇이나 못 하는 게 없는 만능이었다. 


 어머니는 일에 묻혀 살면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고 불평하는 법도 없었다. 할머니가 가끔 잔소리를 하고 싫은 소리를 해도 다소곳이 듣기만 했다. 면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고 ‘부끄러버 죽는 줄 알았다’며 겸연쩍어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도 싫은 소리를 결코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며칠간씩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찾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마다 어머니는 정말 궁금하거나 속상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우리를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걸 늘 마음 아파했다. 키가 제대로 크지 않고 팔다리가 가늘고 힘이 약한 아들을 안쓰러워했다. 늘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고 머리에 부스럼을 달고 사는 아들의 모습에 늘 애를 끓였다.

 여름날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닭을 잡으면 내 생일날이었다. 어머니가 끓여준 닭국은 언제나 맛있었다. 닭국은 누나나 동생, 할머니나 아버지 생신 때도 끓였을 것이지만 내 생일날 먹은 닭국만 기억이 난다.  


 "밥을 할라꼬 쌀 푸러 고방에 들어가이 커다란 짐승이 한 마리 누워 있더라. 깜짝 놀라 가마이 보이 그기 용이더라. 그런데 그 크던 용이 점점 작아지더니 개만 해지더라. 이상타 생각하만서 ‘야 니가 용이구나’ 머리를 쓰다듬으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더라. 머리에 난 터리(털)가 눈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잔뜩 났었는데 니가 처음 태어났을 때 천상 그때 꿈에서 본 용 그대로더라." 언젠가 어머니가 해 준 내 태몽 이야기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늘 배가 화한 것 같고 속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하곤 했다. 병원에서도 제대로 병명을 못 잡아내는 것 같았다. 눈이 늘 쾡했고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던 어머니가 잘 웃지도 않게 되었다. 

 외삼촌들은 ‘누님은 군에서 제일 미인이었다’고 자랑을 하곤 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젊은 시절에 무척 미인이었겠다’는 소리를 많이 듣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가 깊은 눈이 더욱 깊이 팬 퀭한 모습으로 화장실에 다녀올 때면 참 보기 싫었다. 끙끙 앓는 어머니 옆에는 무서워 가지도 못하고 저러다 죽는 게 아닌가 무섭고 겁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가슴 콩닥거리며 지붕을 쳐다봐야 했다. 집 가까이 올 때마다 지붕 쳐다보기가 정말 싫고 무서웠다. 그래도 눈은 저절로 지붕을 향하곤 했다. 어머니의 하얀 옷이 지붕에 올라가 있지 않은 걸 확인할 때마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했다.

 오랫동안 병환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내고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은 이후로는 자궁이 없어 속이 늘 허전하고 허리에 힘이 없다는 말씀을 하곤 했지만 큰 병 없이 아주 건강해졌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허리가 많이 굽기 시작했다. 허리를 구부려서 일을 하면 힘이 덜 들고 허리도 덜 아프다면서 굽은 허리를 더 구부려 일을 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지집아가 학교는 무슨 학교냐'며 그만두라고 했다는 거였다. 외할아버지 몰래 얼마간 학교를 더 다니다가 외할아버지한테 들키고 나서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걸 한스러하셨다. 어머니는 겨울철이면 가끔 장에서 옛날이야기책을 사 와서 읽고는 했다. 장화홍련전, 심청전, 춘향전, 박씨전 같은 책들이었다. 옛날 글씨로 되어 있는 아주 얇은 책이었지만 어머니는 시조를 읊듯이 곡조를 붙여가며 읽었기 때문에 책 한 권을 읽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어 보려고 했지만 옛날 글씨체라 읽기가 어렵고 별 재미도 없는 거 같아 덮어버리곤 했다.


 한참 낮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급하게 책보자기를 챙겼다. 학교에 늦을 것 같아 밥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디 가느냐고 어머니가 물었다. 학교에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빙긋이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길에 학교 가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어 지각이구나 생각하며 마구 내달렸다. 마을 어르신 한 분이 급하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학교에 간다고 하자 학교는 아침에 가지 저녁에 가느냐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날이 어두워지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웃으며 벌써 학교에 갔다 왔느냐고 했다. 왜 저녁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자 이젠 너무 낮잠을 오래 자지 말라고 했다.


 학교에서 풀씨를 훑어 오라고 했다. 산을 푸르게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산에 나무와 풀을 많이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풀씨를 많이 훑어오면 보리쌀을 준다고 했다. 여름내 먹던 보리쌀이 다 떨어져 보리밥이 먹고 싶다는 어머니 말씀을 들은 터라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 집에 오면 풀씨를 훑으러 산으로 쫓아다녔다. 학교에 풀씨를 가지고 온 아이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책보자기에 소중히 싸 온 보리쌀을 어머니는 ‘벌거지 나고 꼼팽이 핀 이 버리쌀을 어예 먹노’ 하면서 소 물통에 보리쌀을 모두 쏟아버리는 것이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덕분에 오랜만에 맛있는 버리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칭찬을 기대했는데 너무 서운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사은회를 한다고 했다.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로 하는 잔치라고 했다. 무슨 음식을 가지고 가야 하나 걱정하며 어머니는 큰집 형수하고 여러 날 상의를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큰집 형수는 부엌을 열심히 들락거렸고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지만 부엌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고 음식에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사은회를 마치고 집에 온 어머니와 큰집 형수는 아주 흡족해했다. ‘선생님이 우리가 준비해 간 음식만 드시더라’는 다소 과장된 말씀을 두고두고 했다.

 “선생님이 니가 학교 전체에서 1등으로 졸업을 한다카민서 교육장상인가 뭔가를 준다카더라. 그 말 들으이 얼매나 기분이 좋든동” 

 “상품은 머 준다 카던데?” 

 “옥핀인가 먼가 준다 카더라.” 

 에게 겨우 옥편? 생각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큰집에서 어머니 혼자 살았다. ‘자식들 짐 되지 말고 혼자 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는 거였다. 어머니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쩌다 아들 집에 오셔도 이틀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 집에 가야 한다는 핑계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개 밥을 주어야 한다는 핑계까지 댔으니 말이다. 혼자 사는 걸 걱정이라도 할라치면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동네 친구들하고 함께 산다고 했다. 동네 친구들하고 어울려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좋은지 아느냐고 했다. 밥도 같이 먹고 가끔 어울려 소주도 한, 두 잔씩 마시고 화투도 치고... 

 왜 감추고 있는 그 속마음을 모르겠는가! 


 평생 일만 하고 산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해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몸이 따라 주는 한 일을 하시라고 권했다. 어머니가 힘들여 가꾼 농작물은 주는 대로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때로는 더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것이 어머니가 바라고 좋아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백 살을 넘게 사시리라 생각했다. 다리 관절이 아파 걷기가 힘들다는 것 빼고는 그만큼 건강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걱정이라도 할라치면 나이가 들어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의사도 그냥 그렇게 견디라고 말했다며 아무 일 없는 듯 밝게 웃곤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감포 앞바다로 가서 회를 먹고 경주 토함산을 찾은 적이 있다.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대구에 가서였다.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길을 다리가 아파 힘들어하면서도 우리 아들 덕에 동해 바닷가에서 회도 먹고 석굴암도 가 보고 호강하는구나 하면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다리 아파하는 것을 아들이 걱정할까 하는 말씀이라는 걸 애써 모른 체했다. 


 밤늦은 시간 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것이었다. 한밤중 대구로 차를 몰아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아무것도 모른 채 누워 계셨다. 뇌 수술을 했다. 남들은 다 하는 파마도 마다하고 일생 동안 지켰던 쪽 머리를 면도로 밀고 수술을 했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두 달여를 아무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만 계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임종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 그대로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뇌 수술하느라 깎은 머리는 오히려 평온함을 더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열 하나를 낳았다. 그중 다섯을 키우고 여섯을 없앴다. 맏이인 큰 형님은 살렸지만 그 밑으로 여섯을 내리 잃었다. 아이가 두, 세 살쯤 되어 홍역이나 백일해 등을 앓으면 그걸로 끝이었다고 했다. 아이가 며칠간 아프다가 힘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마실을 다녀오라고 어머니를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이웃집을 다녀오면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에 묻었느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그치 다 인물이 훤했단다. 일찍 잃어 뿌리가 아까분 생각에 그런 건 아이고 참말로 하나그치 다 그래 이뻤단다. 니들도 이쁘지만 가들만치 인물이 그래 훤하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없앤 아가 니 살 때였는데 참말로 훤했단다. 참말로 아까밨다.”


 어머니는 참 착한 분이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고 흉도 보지 못했다. 누구 하고라도 싸우는 걸 한번 보지 못했다. 집안일은 모두 아버지가 결정했고 어머니는 묵묵히 따랐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묻자 ‘그래야 집안이 편안하지 않느냐’고 그저 웃기만 했다. 어머니께 꾸중을 듣거나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어릴 때라도 한 번이라도 때리거나 혼낸 적도 없는가? 말 안 듣고 속상할 적도 있었을낀데.” 언젠가 야단 한번 치지 않는 어머니가 신기해서 물은 적이 있다. 

 “암매 니가 서너살 쯤 됐을 땔 끼다. 뭔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널 때릴라꼬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 나갔는데 그걸 보고는 멀리 논두렁 한가운데까지 내빼더라. ‘엄마 안 때린다. 이리 온나 이리 온나.’ 캐도 엄마한테 오지도 않더라. 그 때부터 니가 놀래까바 널 때린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니가 어디 한번이라도 맞을 짓을 했나. 니같으만 열이라도 키았을끼다.”


 어머니 가신지 25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저승에서 아버지와 반갑게 만나셨을 것이다. 아버지보다 15년이나 더 살아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많이 부끄러워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두 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계실까? 이승에서와 같이 어머니는 아버지 수발이나 드시는 것이 여인네의 숙명이자 행복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시지 않을까? 착하디 착한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살아가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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