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슬레이어즈를 본 사람 중에 '황혼보다 더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를 중얼거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손에 장을 지지겠다. (이건 해리포터를 읽거나 본 사람 중에 '아씨오!' 한 번 외쳐보지 않은 사람 없음과 일맥상통한다) 소름이 오도도 돋아 비명을 지를 것처럼 오글거리는 마법의 주문서는 만화 슬레이어즈의 전매특허이며, 슬레이어즈는 지금 만화계의 트렌드라는 '이세계'물의 시조와도 같은 격이다. 일각에서는 중2병 만화의 대선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의견에 십분 동의하는 바다.
이 만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몹시 어렸지만, 그 어린 마음에도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리긴 어려도 눈치라는 것이 존재해서, 복잡한 세계관을 용쓰며 만들어놨는데, 단순히 몇십 부작 하는 애니메이션으로만 끝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날의 내가 이토록 영특했다) 그리고 끝내는 이 만화가 원작 소설이 있었으며, 원작은 훨씬 더 암울하고, 잔인하고, 소름 돋고, 오글거린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실제로 원작 소설도 몇 권 구매했었는데, 활자보다 그림이 훨씬 더 좋았던 꼬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웬만한 덕질의 흔적은 전부 수집하는 내가 지금 그 소설책은 찾을 수 없다)
우리 동년배들 중 슬레이어즈를 모르는 동년배는 여태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만화가 얼마나 인지도 면에서 뛰어난지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 고로 대부분의 동년배들이 저 '황혼보다 더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를 외쳐봤다는 얘긴데, 나는 이 사실이 두고두고, 지금까지 그렇게 우습기 짝이 없다. 분명 슬레이어즈는 익살맞게 낄낄거리기 좋은 소재지만, 훌륭하다고 치켜세울 점도 충분히 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겠지)
황혼보다 더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시간의 흐름 속에 파묻힌 위대한 그대의 이름을 걸고
나 여기서 어둠에 맹세하노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게
나와 그대의 힘을
위대한 파멸의 힘을 보여줄 것을!
-드래곤 슬레이브 전문-
개인의 취향에 따라 창작물의 어느 포인트에 매력을 느끼는지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지만, 나 개인의 경우 크게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끼거나, 세계관에 큰 매력을 느끼거나. 슬레이어즈는 압도적으로 후자다. 그렇다고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보다 세계관 자체가 더욱 매력적인 소수의 작품(이를테면 The Lord of the rings) 중 하나라는데 의견을 더한다. 더불어 세계관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캐릭터들, 즉, 우주를 창조한 허무의 왕 로드 오브 나이트메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차원을 관장하는 마왕 샤브라니그두, 그의 심복 명왕 헬마스터 피브리조 등, 캐릭터들의 소름 돋는 작명 센스도 큰 매력 중 하나다. (왠지 이 이름들은 비대면 키보드로 말하고 있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마저 든다. 참으로 훌륭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뽑는다면 단연 제로스. 평상시엔 진지함이 다소 떨어지고 헬렐레 거리며 웃는 실눈이던 녀석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눈을 부릅뜨고 간지를 터트리는 이른바 실눈 포스 캐릭터로, 지금은 거의 클리셰처럼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몹시도 충격적인 컨셉이었다. 실눈 포스 캐릭터의 원조로서 개인적으로 슬레이어즈를 언급할 때 반드시 빠트리지 않고 찬양하는 부분. 이후 수많은 실눈 캐릭터에게 그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보라. 좋아,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의 묵념을 하자.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주 많은 영웅들에게 늘 구해지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16살의 꼬마 소녀가 허무의 신으로 빙의되면서까지 구해준 세상에서 오늘도 마법서 주문이나 염불처럼 외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인간인지도 모를 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