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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ryblack Apr 17. 2021

[뮤지컬&영화]시카고 :록시하트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스포가 있습니다~



음악이 듣고 싶어서 틀어보는 영화가 있다.

어쩌다 떠오른 음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고, 눈을 감으면 뮤지컬의 그 장면이 시작되어서, 결국 왓챠에서 영화를 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뮤지컬 영화를 좋아한다. 화려한 춤과 함께 인생에 대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단순한 이야기도 시적으로 다가와 그 감동이 배가 된다. 하필 재즈도 엄청 좋아하는데, 또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이기적이게 당당한 여성들이라면 이유를 묻고 따지기 전에 본능적으로 좋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좋아하는 것들이 완벽하게 만난 영화가 바로 시카고이다. 시카고가 내 취향인지, 내 취향이 시카고 덕분에 만들어졌는지 나는 그 선후를 정리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시카고를 틀었었다. 영화의 빠른 템포와 자극적인 이미지들, 진득한 재즈, 이기적인 캐릭터들의 엇갈리는 욕망들은 어쩐지 통쾌한 타격감까지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은 흡사 좋아하는 재즈바에서 위스키를 한 잔 마셨을 때 같아서,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잘생겼으나 흥미롭진 않은 대상과 술을 마신 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은 남진 않지만 그냥 기분은 좋은 것처럼, 영화 시카고를 다 보고 났을 때에 취기 외에 맘 속 깊이, 여운 같은 것은 그다지 남지 않았었다. 좋은 영화가 아니었던 걸까? 분명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서랍을 열어 뒤적여 봐야 '의미'란 것을 찾을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영화 시카고는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하기 전부터 좋아하던 작품이기에,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난 뒤로는 더욱 그 감정이 애매해졌다. 얼핏 여성 혐오적인 것 같으면서도, 또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나를 아리까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데 왜 좋을까? 좋아하는 건 사실인데 왜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작품일까? 왜 진심으로 좋아해도 되는 건지 계속 의심이 드는 걸까? 왜 밀도가 넘쳐서 흐르다 못해 끈적한 이 영화의 주인공 둘이 성공하는 엔딩을 봐도 시원하지 않을까? 이렇게 애정과 함께 덕지덕지 찝찝한 궁금증이 묻어있는 가운데 친구가 뮤지컬 시카고를 보여주었다.


비로소 미뤄둔 서랍 정리를 해야 하는 날이 온 것이다.







Roxie Heart


왜 내가 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하면서도 사랑할 수는 없었는지,

그 첫 번째 원인을 짚자면 그것은 바로 ‘록시 하트’였다.


작품을 사랑하는 데 있어 주인공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필연이다. 그래서 록시 하트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너무나 발칙하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냐고 되물어 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공에게 인간다움을 느끼는 것은 내게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 지식인이고 실제로 내가 사는 도시에 이런 사건이 터졌다면 솔직히 말해서 내 복장도 같이 터졌을 것이다. 한 여성이 살인을 저질렀으나, 그녀가 아름다워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용서하고, 무죄 선고를 위해 그녀의 물건을 사주는 등 후원을 하다니... 같은 여성이라 해서, 그녀를 응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 테니까.

특히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용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름다운’ 여성이었기 때문에 관심과 포용을 받은 것도 생각하면, 오히려 나는 아마 질투인지 정의감인지 뭔지 모를 뭔가를 느끼면서 더 신랄하게 세태를 비판하고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발언을 떠올리면 이건 전혀 과민 반응이 아니다.

록시 하트는 “살인을 저질렀지만 범죄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인생을 얻은 대신 세간의 관심을 잃었다며 불만을 토한다.



이게 과연 이해받을 수 있는 생각일까?

타인의 목숨보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보다도 ‘유명함’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여성이라는 캐릭터 설정은 애초부터 납득되지도 않으며 실제로 존재할 수도 없다. 나는 이런 과도한 캐릭터 설정이 그간의 ‘여성 혐오적 영화의 역사’에서 만들어져 왔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단편적이기만 한 여러 '여성 캐릭터 설정' 중 하나라고 여겼고, 이런 여성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당연하게’ 넘겼었다.

 이 과장된 캐릭터 설정이 정말 흔한 여성 혐오의 과오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이 영화를 통틀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회비판'이라는 주제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뮤지컬을 보며 비로소 떠올리기 시작했다.




jazz.

이어서, 찜찜한 그 두 번째 원인을 꼽자면 바로 '재즈'라는 면죄부이다.


내가 주인공을 이해하기도 전에, 영화 속 대중들은 ‘jazz의 소용돌이’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얼토당토않는 변명을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며, “jazz가 너무했네”하고 수긍한다.

얼마나 세상이 미치고 팔짝 뛰게 돌아가야 그 변명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도대체 그들에게 ‘jazz의 소용돌이’는 무엇이길래..? 우스갯소리로 ‘음악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허락한 마약’이라는 말처럼 jazz라는 마약에 취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 말을 그냥 곧이곧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선택을 understandable 하게 만드는 1920년 시카고로 안 가볼 수 없다.


뮤지컬 시카고는 1920년, 미국의 경제 호황기 이후 부패하기 시작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19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 밀주 판매와 함께 매춘, 마약 밀매 등 불법 사업이 성행했다. 이때 불법 사업을 주도했던 ‘알 카포네’라는 마피아가 있었는데 그는 언론을 이용하여 ‘자상한 아버지, 카리스마’등의 이미지를 제조했고, 대중들의 미움을 사기는커녕, 대중들의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시대에 작가 몰린 달라스 왓킨스(Maurine Dallas Walkins)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소속으로  카운티의 법정 기자로 활동하면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고, 1924년의 법정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희곡 <작고 용감한 여인 A Brave Little Woman> 쓰게 된다. 그리고 이후 1970년대에 활동하던 배우 그웬 버든이 왓킨스의 희곡을 남편이자, 연출가이자, 안무가인 밥포시에게 추천했고 뮤지컬 시카고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왓킨스는 막대한 돈을 지불하면 진실이고 정의고 뭐든 간에 승리를 얻어내는 변호사와 이를 눈감아주는 부패한 경찰들, 그들과 짜고 치며 자극적인 사건만을 만들어내는 언론들, 그리고 불법사업을 저질러도 미디어를 이용해 이미지 세탁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마피아 등이 판을 치는, 이 세상 돌아가는 꼴들을 보면서 이를 고발할 작품을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써 내려간 이 고발극 안에서 '자본주의'라던가 '돈'이라는 소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변호사 빌리는 내가 필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말하며 손을 벌리고 범죄의 모든 이유는 그저 ‘재즈의 소용돌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최 모든 것에게 면죄부를 제공해주는 재즈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극은 재즈로 시작해서 재즈로 끝난다. 아래는 극 중 마지막 넘버 nowadays의 가사이다.


There's men

Everywhere Jazz

Everywhere booze

Everywhere life

Everywhere joy

Everywhere, nowadays

You can like the life you're living

You can live the life you like

You can even marry Harry

But mess around with Ike

두 여성은 요즘은 어디든지 삶과 즐거움이 있고, 원한다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극 속 재즈를 부르고 즐기는 동안 인물들은 화려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렇게 음울하고 모순된 1920년대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주인공들은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즐거워 보이고, 살고 싶은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행복해 보일 수 있을까?


사실 질문을 바꿔 다시 물어, 자본주의에서는 행복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닐 것이다. 단적으로 2020년대 자본주의를 사는 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지금 글을 쓰며 힙한 카페에서 커피와 스콘을 시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돈 주고 산다. 달콤한 맛, 힙한 카페에 있으니 힙하다는 기분, 모두 돈으로 주고 산 '행복감'이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자면 1920년에서는 그 '행복감'은 바로 재즈와 술과 섹스일 것이다.


변호사인 빌리와 교도관인 마마는 사랑(돈)으로, 벨마와 록시는 재즈(명예)로 행복을 찾는다. 그렇다. 자본주의가 갖다 줄 수 있는 행복은 바로 ‘쾌락’이다. 이것이 바로 시카고 속 재즈의 의미이다. 그렇게 오픈 넘버 all that jazz 울려 퍼지며 뮤지컬은 시작하고 엔딩 넘버 nowadays를 부르며 뮤지컬이 끝나는 것이다.



불안하고 불안한 세상은 인간을 더 강한 쾌락에 중독시키고 인간은 만족하는 방법을 잊는다.

록시 하트에게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쾌락은 목숨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에게 ‘인생을 선물 받아도 만족할 줄 모른다’는 이상한 캐릭터 설정이 주어져도, 혹은 더한 설정이 주어진 대도,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보다 이상하지 않다.


교수형을 면했지만 유명세를 잃어 슬픔에 빠진 록시하트는 오디션에서 ‘nowadays’를 부르며 결국 무대에 서고, 벨마켈리와 함께 성공하며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어찌 보면 록시의 고민을 해결한 엔딩이기 때문에 해피엔딩으로 느껴져야 정상일 텐데, 총을 들고 무대를 활보하는 멋진 두 여성과 전구가 팡팡 터지는 무대를 보아도, 좀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자본주의가 폭파되는 결말이었다고 해도 나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결말을 상상해도 찝찝한 기분이 계속 묻어난다.


애초에 이 극은 만족하기 위한 극이 아니었음을 글로 쓰면서 나는 비로소 찝찝함을 씻어낸다.






부조리극 시카고


뮤지컬 시카고는 이 극의 목적이 카타르시스나 만족감이 아니라, '비소'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연출 방법 속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를 적극 활용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의 극작가 겸 연출가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독일의 나치스가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덴마크-핀란드-미국으로 망명을 하다가, 종전 후에는 미국의 매카시즘 때문에 스위스로 떠났고, 마지막으로 동독을 선택하며 동독에서 사회주의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동독에서도 동독의 체제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반자본주의적 작품을 만들고 반자본주의적 국가를 선택한 뼈 반자본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 수많은 작품 등에서 보여준 ‘소격 효과’를 통해 전달한다. 소격 효과란 관람객들에게 극에 감정이입하거나 작품에 몰입하지 않도록 꾸준히 방해하고 당신을 속이는 장면들에 빠지기보다는 한 발짝 멀리서 현실을 관조하고 비판하기를 요청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를 뮤지컬 시카고도 적극 사용한다. 출연진은 자신의 턴이 아니어도 무대 위의 의자에 앉아 함께 무대를 관람한다. 이는 흡사 연기연습실에 함께 들어와 연출가의 눈으로 극을 보는 것처럼 극을 비판적으로 관람하게 돕는다. 또 오케스트라를 무대 중앙에 위치시키고, 극 중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인물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 외에도 찾아내려면 하나하나 소격 효과가 아닌 것이 없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활용한다.





돌고 돌아, 결국 뮤지컬 시카고가 소격 효과를 적극 활용하는 연출을 하는 것과 내가 영화 속 록시 하트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맞닿아 있다.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정의를 호도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베르톨트의 소격 효과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을 확인하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왜 록시 하트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마 나는 영화의 화려한 이미지에 몰입해버려서 거리두기에 실패했던 것같다. 아니, 어쩌면 거리두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왜 내가 이 사랑스러운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었는지, 이 과장된 여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자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의문을 가졌었으니..

하지만 남겨졌던 궁금증과 찝찝함을 뮤지컬을 본 뒤에서야 씻어 내릴 수 있었다.


혹시 나처럼 록시를 좋아하기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아쉬웠던 사람들에게

“아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그 친구가 겉보기엔 끈적해 보여도 사실은 적당한 거리두기를 좋아하는 친구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참고 글

=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26&t_num=4458https://m.blog.naver.com/niceworld21/221316291691


https://m.blog.naver.com/niceworld21/22131629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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