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고해 보는 회고록
-세상에 나를 맡기면 세상은 나를 닳아 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자기다움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일을 통해 나를 스스로 깎는다면 나는 닳지 않고 조각될 수 있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보다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자기다움을 스스로 인식하고 구축할 것인가 먼저 환경에 의해서 닳지 않고 자신을 깎는(조각하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나를 나되게 하는 선택,
나를 나되게 하는 느낌,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
<자기다움 – 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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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 책을 읽고, 권민 대표님과 면담 후 다시 글을 써본다.
몇 번의 화살을 맞아야 봐야 진정 깨닫는 건지,,,,,,,
분명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경험 없이 깨닫는 건 없다.
이해했을 뿐이지.
이해하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인가 보다.
나를 나되게 하는 느낌이라~~~~
그 보이지 않는 느낌을 감각하기 위해 감각을 깨운다?
나를 나되게 하는 선택의 첫 담금질은 어디서부터 시작일까.
지금 이 물결의 파장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물결일까.
20년 몸담았던 직장생활 퇴사 1년 전. 내면의 호수에 돌덩이가 툭 던져진 날을 찾았다!
색채심리를 만나던 날.
회사에서 스위트 숲이라는 브랜드를 접으면서 부서별 공간이동이 시작되고 소재실을 옮기느니 마느니 하다가 ’비지트‘와 ’숲‘ 두 브랜드 소재실을 통합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2층에서 올라온 마케팅실이 들어갈 공간이 마땅치 않아지자 숲소재팀이 쓰던 공간을 마케팅팀이 들어가고 3층에 남은 큰 공간을 소재실이 통합해서 쓰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재실이 통합되고 같은 공간을 쓰게 되었다. 비지트의 소재 팀장은 공석이었는데 마침 그 때 나와 동갑인 소재팀장이 아르바이트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앉게 된 것이다. 일을 하며 동갑인 소재 디자이너를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무엇보다 그 친구는 항상 아침에 김밥(엄마가 분식집을 하셨다.)과 과일 같은 것을 싸와서 소재실에서 화기애애하게 나눠먹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사람이 금세 친해지는 것은 먹을 것을 나눠 먹을 때라는 것을.
동갑인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중에 뭐할 거야라는 질문을 나누게 되었다, 내가 실장이 될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나와 일하던 선배 디자이너 언니들은 가정에 있거나 컨버터를 하거나 였다. 내가 별로 내키지 않는 소재 디자이너의 그 끝의 길,,,,그동안 나는 후배들이랑 이런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기에 동갑인 친구가 왔을 때 누구라도 붙잡고 속 얘기를 막 하고 싶던 차이기도 했나 보다. 나는 선배로서 좋은 길을 가고 있다는 본보기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이랑은 회사 욕을 하지 않으며 윗사람 험담도 잘 안 한다. 그 동갑친구는 아는 언니가 색채심리를 공부하는데 자기 보러 퇴직 후 이쪽이 전망이 밝다며 미리 공부해 놓으라고 조언했다고 했다.
나는 처음 듣는 색채심리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컬러리스트랑 연관이 있는 건가? 회사 밖을 나가서도 내가 해왔던 색채라는 것으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이렇게 잠자던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졌다. 아직까지 자기다움보다는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먼저 접했다. 내 잠재력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가 나의 주된 화두였다.
때에 맞는 인연이 생기는 것 같다. 혹은 때에 맞는 인연이 오는 것이라든지
그래서 그 언니에게 색채심리를 배우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바로 연락해라고 했다. 그 언니라는 분은 전주에서 아동 심리 상담센터를 크게 했다가 접고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다른 공부를 또 하고 또 하고, 배움의 끝이 없다며 그 언니는 이제 국가지원사업으로 시야가 더 넓어져 숲과 치유센터를 차릴 생각으로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 아무튼 그 언니라는 분이 매봉역에 있는 색채심리연구소를 소개해주었다. 일본 색채심리 한국지부인데 그곳이 색채심리를 정통으로 가르친다며 배울 거면 그곳에서 배우라고 조언까지 해주셨다. 우리는 당장 같이 배우자며 호기심이 일었고 2주 후에 개강하는 주말 기초과정을 같이 듣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바로 등록을 했다. 2주 후에 토요일 집을 나서며 친구에게 어디냐고 전화를 했다.
“헐.... 너 등록했어?”
“뭐야 ~~ 같이 한다며 ~~ 등록 안 했어?”
그렇게 나만 색채심리 수업을 듣게 되었다. 양재천 앞에 통유리로 되어 있는 색채심리 연구소는 분위기가 따뜻하고 아늑했다. 토요일마다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일단 좋았다. 인천에서 양재까지 매주 토요일 수업을 내가 나올 수 있다니!!!
토요일 오전 10시. 어린이집 선생님인 20대 수정샘, 아모레퍼시픽에서 일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희찬샘(나랑 동갑인 남자분이시다) 사업을 하고 다 말아먹고 다시 일어섰다며 자기소개를 솔직하게 하시는 유머 넘치는 60대 여사장님, 나중에 여사장님을 영이샘이라 불렀다. 이렇게 4명이 모여 수업을 들었다. 8주 과정의 기초반을 다 듣고 초급반을 이 4명이 또 다 같이 들었다. 서로 다른 4명이 묘한 친밀감과 유대감으로 연결되었다. 그 이유는 색채심리가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서로의 내면에 반응하고 감동하면 보이지 않게 연결되는 유대감이 있다. 질문받지 않아서 굳이 말한 적 없던 나의 과거를 날 것으로 그려보며 나를 돌아봤다. 이것이 색채 앨범인데 나의 히스토리를 색으로 나타내며 스토리를 이어 보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과거 어느 시점과 이렇게 같은 색으로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 혹시 어떤 공통점이나 연결점이 느껴지시는 것이 없나요? 이렇게 연구소 소장님이 물었을 뿐인데 아~ 내가 지금 뾰족하고 불편한 감정은 어릴 적 아파트의 회색빛, 네모난 베란다에 갇힌 것 같은 어릴 적 나, 그때 내가 엄마를 부르며 울었어요. 최면 의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의 감정이 훅 올라왔다.
사실은 그것을 꺼내서 보니 생각보다 큰 상처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60대 산전수전 다 겪은 사장님은 더 아픈 과거를 이야기했고, 20대 수정샘은 그보다 더 아픈 과거 이야기를 했다. 내 과거 이야기는 그들의 아픈 경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누구나 해소되지 않는 감정과 아픔을 안고 사는구나를 처음 깨달았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기에 굉장히 색채심리라는 분야가 신선했다. 내가 초급반을 다 듣고서야 나를 소개해준 친구는 기초반을 등록했다.
중급 반일 때는 여사장님과 내가 한 팀이 되어 인스트럭터와 내담자로서 실습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실습 코칭을 하기 위해 여사장님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고민은 정말 나의 고민이기도 했으며 뭔가 찌릿했다.
“내가 정말 잘하는 일을 찾아서 거기에 죽을 때까지 열정을 쏟아붓고 싶어요.”
60대가 되어서도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구나!!!!
40대인 나도 제2의 직업으로 지금 이것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인데 이걸 못 찾으면 60대가 되어서도 계속 고민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니 조급함도 들었다. 40대에 사업을 실패하고 산전수전 다 겪고 60대 지금에야 좀 환경이 안정이 되었다고 하셨다. 아직 현업으로 일하시는 서울대 나오신 치과의사남편이 계시고 자식들은 다 외국에서 평안한 가정을 이루고, 아주 사소한 고민거리일지라도 엄마와 현명한 조언을 주고받는 자녀들이 있고, 나비랑 대화를 나누는 똑똑한 다섯 살짜리 손자가 있다고 하셨다. 과거는 어떨지언정 현재 부러울 것이 없는 평범보다 좀 나은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시는데 무슨 고민이 있으실까 싶었다. '열정'이란 것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일 지도 모른다.
직업 말고 다른 그 무엇을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이지?
나는 색채심리 실습을 진행하며 여사장님이 어릴 때 영이라고 불렸던 그때가 가장 그분다운 모습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고민은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열정을 담고 싶은 일을 찾는 것 같지 않았다. 직업 말고 다른 그 무엇을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이지? 나는 처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소명 같은 거? 그게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회기 때 ’ 영이‘라는 명함을 만들어주고 빨간 레드카펫을 깔아주었다. “오늘부터 영이샘이십니다~. 선생님의 컬러인 레드의 열정을 밟고 나와주세요.” 여사장님은 다시 태어난다며 레드카펫을 밟고 여배우처럼 손을 흔들며 나오셨다. 그 명함을 굉장히 맘에 들어하셨다. 어릴 적 무대 주인공의 역할 이름이 영이었고, 영혼의 영처럼 ’ 영‘이라는 것이 본인의 정체성인 것 같다고 얘기하셨다. 이때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영 이샘은 무슨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이런 실습의 기회를 통해 나는 누군가를 위해 이벤트를 기획하고 감동 주고 동기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의 조각들을 풀고 넘어가야겠다.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고 계획할 때 즐거워했던 내 모습들의 조각들이 더 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더운 여름, 자율학습시간에 너무 더워서 책상에 아이들은 엎드려 자고 있고 부채질을 막 하고 있다. 나는 물풍선을 만들어 몰래 친구 책상에 놓고 오거나 쪽지로 응원의 문구를 꾸며서 몰래 놔두고 온다거나 그런 짓(?)을 많이 했다. 다단계를 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는 팀원들의 잠을 깨워주고 동기부여를 하려고 노동요를 직접 개사해서 다 같이 삥 둘러앉아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한 사람을 위해 ( 혹은 특정 다수를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밖에 못하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나의 키워드인 창조에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활력을 유발하는 동기부여 차원에서의 느낌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예술과 나의 창조 키워드는 현재 맞닿게 된 것 같다.
영이샘은 실습이 끝나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선미샘 통찰력이 대단하네요~나를 이렇게 잘 이해하다니 ~~”
그 이후로 영이샘은 그동안 써왔던 글을 보여주시며 나라면 자서전식으로 편집을 잘해줄 것 같은데 책을 써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나는 영이샘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생 선배로서 존경했고 나의 고민을 털어놓는 멘토이기도 했기에 솔깃했으나 나는 그때 글쓰기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자신이 없다며 미적미적거렸다. 그리고 영이샘은 주변에서 영상 강의를 찍으라고 한다며 나보고 같이 가줄 수 없냐고 하셨다. 당산역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영상을 만들고 계셨다. 인생의 지혜 같은 인문학 내용이었는데 영이샘은 대본을 보는 것보다 대본 없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2번 정도 영상 촬영을 하는 곳에 같이 갔다. 그 뒤로 영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행은 안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가끔 안부만 묻다가 한동안 서로 뜸하게 지냈다.
희찬샘의 결혼 소식에 우리 넷은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수정샘과 영이샘을 만났을 때 영이샘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내 운명이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신학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영이샘의 친구분들이 신학대학교에 대신 원서를 넣었고 본인이 어떻게 목사를 하냐며 그때까지도 공부 중이라고만 하시고 말을 아끼셨었다. 언빌리버블이라며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나는 22년 3월에 영이샘의 광주 오포읍에 교회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첫 예배의 자리에 갔다. 영이샘은 나에게 말했다. ”영이샘, 너무 놀랍고 축하드립니다. 레드의 열정이 열매 맺은 건가요? “
“선미샘. 운명은 거스를 수 없나 봐요. “
20대에 깊은 생각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던 수정샘은 그 뒤 유치원을 관두고 책을 썼다. 수정 빛 <서른 살의 규칙>이라는 책이 나왔다. 수정샘은 책이 나오기 전 초창기 때 나에게 글쓰기가 좋다며 선생님 한 분을 추천해주며 특강을 한번 들어보라고 했다. 1일 글쓰기 특강은 좋았는데 왠지 나는 끌리지 않았다. 그냥 딱 보기에는 말끔한 외모인 40대 후반의 남자분이었는데 금반지와 금시계, 너무 꾸민 듯한 머리와 의상 스타일이 나는 그때 참 그런 것들이 왜 거슬렸는지..... 그분은 깔끔하게 입었을 뿐인데 왜 내 눈엔 과시를 위한 패션으로만 보이는지, 너무 진행을 잘하는 그 옆에 젊은 여자 강사님도 너무 말을 잘하니까 거부감이 드는 이상한 심리,,,,,,사람이 좀 푸근하고 구수한 맛이 있어야지 세련되게 꾸며진 4층의 빌딩을 보면서도 글쓰기로 돈을 버는 일인가? 그래서 글쓰기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를 과시하는. 퍼스널 브랜드를 위한 도구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분과 1시간 상담도 했는데 기억 남는 게 없는 ,,,,,뭐라 말할 수 없는데 그냥 나랑 결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느낌만 있었다.
바위 안에 비너스상을 보는 사람
색채심리로 뭔가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블로그를 보다가 강점 코칭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접수를 하고 1대 1 코칭을 받았다. 이것저것 회사일에 대한 얘기부터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다.
“선미님은 바위 안에 비너스상을 보는 사람이네요. ”
처음 낯선 타인에게서 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봤다. 강점 코칭(배움, 협력, 공감, 책임. 화합)을 받고 코치님한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의 해석은 달랐다. 바위 안에 갇혀있는 나? 코치님의 의도는 생각 너머의 본질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뭘 해야죠? 이게 나의 다음 질문이었다. 본질을 보는데 무슨 쓸모가 있죠? 회사를 나오고 싶은데 본질을 보는 게 무슨 의미죠? 답을 찾으리라 ~~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정말 본질을 보는 사람이라면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나의 닉네임은 비너스가 되었다.
코치님은 나에게 블로그에 100일만 매일 작정하고 글을 써보라고 했다. 그렇게 블로그를 처음 팠다. 2019년 4월 24일 나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내 삶의 실타래> 폴더를 만들었다. 그날그날의 짧은 단상들이다. 첫 글이 ’ 끝을 내야 중립지대를 거쳐 새로운 시작으로 간다.‘라는 글을 썼다. 2020년 12월 30일에 회사생활의 끝을 냈으니 아마 이 글을 쓰며 퇴사의 마음을 제대로 먹은 날이 아닌가 싶다. 퇴사의 마음을 먹으니 정말 내가 하는 패션 소재 디자이너 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강점 코치님은 코 멘토에서 주최하는 취업 세미나에 무료 초대를 했고 코치님의 강의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아주 우연히 건대 입구에 있는 파랑새 전시가 눈에 띄어 들어갔다.
용기는 이렇게 아주 우연한 영감 하나로도 충분한 것인가 보다.
내가 파랑새 전시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시회 팸플릿에 지도처럼 되어 있었는데 나는 내 인생의 지도를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행복은 가까이 있는 것인데 나는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것인가. 세미나가 끝난 후 코멘토에서 주최하는 직무 부트캠프에 현업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 우연히 하필 그날, 남한산성 행궁에서 진짜 파랑새를 봤다. 버스를 내려 행궁을 지나 집으로 오는 길, 파랑새가 나무에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보고 있었는데 난 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에 가슴이 떨렸다, 이거 뭔 일이냐,
그 파랑새는 애완용이었는데 그날 어느 관광객이 행궁으로 파랑새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하필 그날, 파랑새 전시를 봤기 때문에 그 파랑새가 의미 있고, 계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뒤로 한 번도 나는 파랑새를 행궁에서 보지 못했다, 이런 영감들의 원천에 이건 나보고 뭔가를 하라는 계시는구나!!!! 집에 와서 코멘토 사이트를 뒤져봤다. 캠프를 하려면 강의안도 내야 하고 뭔가 복잡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걸 준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하면서도 직감적으로는 이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소재 디자이너 직무 부트캠프를 시작했고 퇴사할 때까지 계속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패션소재 디자이너 직무 에센셜 전자책을 썼다. 나는 마지막 날 회사를 나오며 전자책을 디자인들에게 나눠주며 당당하게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퇴사일에 맞춰 전자책은 발행되었다. 뭔가 되게 하려면 그 되게 하는 그 무언의 계시가 있다. 그래서 난 웬만하면 일단 하고 나서 고민하는 편이다.
이번엔 아이덴티티 수업이 눈에 띄었다. 강의 도중에 <인생학교 – 일> 책을 추천받았다, 책 속에 미켈란젤로의 ’ 죽어가는 노예상‘의 사진이 있었다. 의미 없이 일하고 있는 직장인들. 우리는 죽어가는 노예로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의미 었다.
돌이 되지 않으려고
자기다움의 책에 ’ 스스로를 조각하는 법‘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조각을 잘하냐는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돌을 보면 그 속에 어떤 조각이 숨어있는지가 보여서 자기는 단지 그것을 파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각에는 깎아내는 것도 있지만 덩어리를 붙여나가는 소조라는 기법도 있다. 본질을 남긴 채 아닌 것은 깎아 내고 새로운 덩어리를 붙여 거친 나를 섬세하게,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예술가의 눈엔 돌덩이를 보고 무엇이 보일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예술가의 눈을. 그 시선을 갖고 싶어졌다. 나는 노예상의 사진을 보고 미켈란젤로의 마음으로 조각하듯 따라 그리고 싶어졌다. 먼저 네모 안을 검게 4B연필로 칠한다. 네모는 이제 검은 돌덩이가 되었다. 지우개 모서리를 잘라서 뾰족하게 만든 다음 조각칼 대용으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긁어내듯이 지워나간다. 검은 돌덩이에서 나는 무엇을 조각했는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했다는 죽어가는 노예상은 미완성 작품이라고 한다. 미대 출신이 아닌 나는 어쨌든 시도해본 그림이다. 시도를 했기에 나는 돌이 되지 않으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내 글 속에 자주 등장한다.>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나를 나라고 제대로 인식한 때는 언제인가. 아마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내가 설마 노예처럼 직장생활을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강력하게 들었다. 이미지는 머릿속의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 설마설마 나는 노예가 아녔노라고 부인하고 싶었다.
아마 이때부터 바위 안에 비너스와 노예상. 나는 어느 지점에 서있는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의문을 품고 나를 찾는 여정이 시작된 것 같다. 자동 반사처럼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돌의 어디 모퉁이를 먼저 칠 것이냐. 돌의 정중앙을 먼저 칠 것이냐. 그 지점을 잘 내리쳐야 할 텐데. 와장창 부서질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아슬아슬한 도전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조각보다는 그림이 좋고, 직조는 늘 하던 일의 하나이다. 캔버스에 문지르거나 지우거나 그리거나,
날실과 씨실을 넣고 빼고 실을 꿰거나 자르거나 매듭짓거나 풀어버리거나,
좀 가능성이 열려있고 유연한 재료를 좋아한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백이 많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도 결과물보다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좋다. 그래서 새로운 기법으로 지우고 뿌리고 긁어내는 등 인생의 결이 담길 법한 그림 기법을 연구하고 싶은 것 같다. 이 호기심이 그다음 미술치료의 배움으로 연결된다.
창조적 인생 무늬를 남기기 위해.
나답게 살겠다는 자기의식이 먼저 세워지면 더 빨리 자기다움의 길을 찾아갈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꼭 먼저 자기의식을 세워야만 나다운 길의 번지수를 찾는 것 같진 않다. 물결의 흐름에 따라 밀려가는 일도 생긴다.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굳이 거스르지 말고 흐름대로 가보는 것 나는 그 방향을 선택한 것 같다.
나의 퇴사를 기다렸다는 듯이 1년 남짓 시부모님 병간호가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죽음으로 가는 인간의 파노라마를 보았고 인간이 남기는 무늬를 보았다. 빈 캔버스를 보면 죽기 전에 내가 그리고 갈, 남기고 갈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줄 하나를 긋더라도 온전히 마음이 담기며 그림 속에서 좀 높은 차원의 다른 상상력이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숨어있다는 것을 먼저 믿고 싶다. 나를 이끌고 가는 존재에 대한 믿음도 있다. 창조 의식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이 행동을 만들고, 그 반복된 행동이 패턴이 되고 그것이 나의 창조적 인생 무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