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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May 14. 2024

영원(永遠), 아름답지만 쓸쓸한 말

-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17)

  영원하다는 말, 그처럼 아득하고도 먹먹한 말이 또 없다. 영원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가물거리는 별빛을 품고 끝간 데 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어두운 깊이를 떠올린다. 그만큼 영원은 까마아득한 거리로 다가온다. 또한 영원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키지 못한, 그래서 회한으로 남게 된 약속과 같은 먹먹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 보면 영원이라는 말 자체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다. 먼저,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지금 맞이하는 봄이 작년의 봄과 같아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해 같은 봄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상이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이상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꿈꾸며 종교를 탄생시켰다. 어쩌면 문학과 예술의 시작도 영원에 대한 갈망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생명만큼이나 영원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모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느끼는 행복감만큼이나 큰 번민이 뒤따르는 것이 청춘 남녀의 사랑이다. 번민의 고통이 적지 않기에 영원할 것 같은 사랑에도 틈이 생긴다. 그 균열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면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도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파탄에 대하여 자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사랑의 배신자로 자책할 이유가 없다. 영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예배로 이루어졌던 내 결혼식의 축가로 양가의 형제 남매가 모여 604장 찬송을 불렀었다.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이 찬송을 부를 때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비기독교인을 감안, 절대자 혹은 신이라고도 하자)의 사랑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부부가 되는 남녀에게 축복을 주기를 간구하는 내용이지만, 비틀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가사에는 우리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찬송한다. 두 사람이 보람 있게 살라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슬픔을 이길 기쁨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있어 이를 방해하는 간난이 있고, 이를 이겨내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찬송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 혹은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eternally’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직역하면 ‘영원히’라는 제목의 노래로 찰리 채플린이 1952년 제작한 유성 영화 ‘라임 라이트’에 나오는 OST로 ‘테리의 테마’가 원곡이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던 찰리 채플린이 작곡한 기악곡으로 이에 가사를 붙인 곡이 바로 ‘eternally’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재즈 가수 사라 본과 영국의 팝 가수 패툴라 클락이 부른 버전이 잘 알려져 있다.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어요

   변함없이 진실된 사랑을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내 마음속으로는

   당신이 나 만의 사람일 때

   태양은 밝게 빛났지요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나에겐 다른 사랑이 있을 수 없는 일

   하늘이 무너져 내릴지라도

   나는 변함없이 진실되게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 주세요


 찰리 채플린은 자신의 영화에 사용할 음악을 모두 스스로가 작곡했다. 뮤직홀 배우를 부모로, 집시의 피까지 물려받았으니 채플린에게 어느 정도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지만, 채플린이 작곡한 곡의 선율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채플린이 작곡한 곡 중에서도 후에 가사를 붙인 ‘smile’(영화 ’모던 타임스‘)과 ‘eternally’(영화 ’라임 라이트‘)의 주옥과 같은 선율을 들을 때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음이 먹먹해지곤 한다. ‘smile’이라는 노래는 가사 자체가 그렇다. “가슴이 아파도, 웃어요,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떠돌이의 캐릭터(중절모를 쓴 허름한 옷차림에 지팡이를 든 채플린)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뒷모습을 남긴 채 사라지는 엔딩 신에서 흐르는 선율에 잘 어울리는 가사로 인상적인 영상과 함께 쓸쓸한 여운을 짙게 드리운다. 그렇지만 ‘eternally’의 가사에서는 간절한 희망 만이 엿보인다. 영원히 사랑하겠노라는 다짐과 자신감이 가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노래를 들을 때 은연중 마음에 치미는 애상 혹은 쓸쓸한 감정에 빠져 들게 된다. 딱히 그런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다. 영화 ‘라임 라이트’가 찰리 채플린의 후기를 대표하는 영화라서, 떠돌이가 아닌 노쇠한 채플린의 모습을 확인하며 느끼는 감정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보다 근원적이고도 오래 내재된 삶의 경험이 그런 감정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싶다.

 eternally는 우리말로 ‘영원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그러나 이득하고 가슴 먹먹한 말이다. 우리 삶의 경험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랑이라면, 영원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재 사랑에 빠진 청춘이 그렇다. 청춘의 짧지만 아픈 터널을 지나온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사랑도 영원하지가 않다는 사실에 수긍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사랑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사랑을 완전에 가깝도록 일구어 갈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에 사랑 또한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특히 내가 기독교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신앙은 자신의 불완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도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니 그 노래를 듣는 마음이 애잔할 밖에. 영원, 아름답고도 쓸쓸한 말이다.


사라 본이 부르는 ‘etern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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