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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보는 시선에서 세상이 열린다

-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by 밤과 꿈

서양미술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화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바로크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첫 손에 꼽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양식적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에 있어 시대양식은 하나의 회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 베르메르의 이 걸작은 바로크시대의 회화가 가진 일반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바로크 회화에서는 르네상스 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윤곽선을 대신하여 명암의 대비로 사물의 경계를 표현한다. 이때 그림의 중심이 되는 피사체에 빛이 집중되고 나머지 배경을 구성하는 피사체를 상대적으로 어둡게 표현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베르메르의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별다른 배경이 없이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어두운 배경에 강한 대비를 이루는 소녀는 마치 화면에서 돌출하여 감상자에게 다가서는 느낌이 든다. 이와 같은 색의 대비와 함께 비스듬한 소녀의 자세에서 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결국에는 감상자의 시선을 응시하는 소녀의 두 눈동자가 차분한 화면을 동적으로 변화시킨다.

르네상스 미술이 정적이라면 바로크 미술은 동적이다. 종교적 내용의 성화에서 볼 수 있는 수직 구도를 채택, 극적인 동세를 확보하는 것이 바로크 미술의 특징인데 반해 베르메르는 안정적인 화면 속에서도 특히 소녀의 시선 하나로 미묘한 움직임,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내용까지도 포착하는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베르메르 특유의 밝고 부드러운 색감이 이 그림을,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소녀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럽고 신비롭게 만들고 있다.


마주 보는 시선은 그 자체가 새로움이다. 사람이 마주 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은 자신감과 신뢰의 기초 위에 이루어지는 행위다. 이 행위를 처세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처음 만나는 시람과도 악수를 나누며 쉽게 시선을 마주한다. 내가 당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이처럼 사람이 서로 마주 보는 시선의 의미와 가치가 지나치게 정형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비즈니스가 대세인 세상이니만큼 그런 현실이 정상적이고 나처럼 정상인 일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서로 잘(깊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과도한 웃음과 응시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 사람은 나를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괜히 내 잘못이 큰가 싶기도 하다. 그와 같은 민망한 상황에 휩쓸리는 것이 썩 달갑지도 않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남녀 사이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교환되는 시선일 것이다. 처음에는 마주 보고 피하는 눈길을 교환하면서 확신이 서지 않는 마음을 저울질하다가 서로가 사랑을 확신할 때 더 이상 피하지 않는 시선은 서로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깊이를 더하게 된다. 그 시선 속에서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모두가 이 설렘과 놀라운 발견으로 벅찼던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이런 경험이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도,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도 가능한 경험이다. 자주 언급하게 되는 경험이지만 내 유년기에 굴뚝새라는 참새과의 작은 새와 시선을 마주했던 적이 있다. 해 저물녘 이웃집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가지에 앉은 굴뚝새와 눈길을 마주했던 것이다. 순간이라고 할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길게 느껴졌던 시간으로 나이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글뚝새라는 미물의 순수하고 깊은 눈망울을 통해 발견한 놀라움은 분명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세상이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도 소녀가 무엇을 바라보든 그 순간 소녀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지 않았을까. 소녀의 무심하면서도 깊은 시선을 마주하는 우리에게도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설렘이나 확신이 아닌, 우주를 생각하듯 미스터리한 궁금증으로 형성된, 새로운 세상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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