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멸에 대한 조바심

- 오정희의 단편소설 '동경(銅鏡)'

by 밤과 꿈

오정희의 소설을 좋아한다. '중국인 거리'나 '유년의 뜰'과 같은 단편소설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묘사에 탄복을 금치 못했었다. 물론 여성의 문장과 남성의 문장은 차이가 있겠지만 오정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처럼 글을 쓸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많은 여성 작가들이 소설가를 꿈꾸며 습작을 할 때 오정희의 문장은 하나의 규범이었다.

나는 오정희의 소설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단편소설 '동경'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이 소설에 마음이 이끌렸다. 섬세한 심리 묘사는 오정희의 소설에서 두드러진 경향으로 내가 소설 '동경'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한 가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이 소설의 화자가 지방 공무원으로 평생 다니던 직장을 은퇴한, 노년(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1982년의 시점으로 볼 때 노년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는 않다)에 접어드는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가 이십 대의 나이로 노경에 접어드는 남자의 심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같은 남성의 관점으로 소설에 접근하기가 편했을 것이다.

작가 오정희가 '여성문학의 대모'라고 불릴 만큼 여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작가이기에 작가가 쓴 대부분의 소설과는 달리 남성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을 수가 있다. 사실 소설 '동경'에서는 화자의 심리 묘사와 더불어 화자가 읽어내는 아내의 심리 묘사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시청의 하급 관리직에서 은퇴한 화자는 업무에 성실했던 만큼 상실감을 크게 느낀다.

"시말서 한 번 쓰지 않은 그도 정년이 되자 시간과 자리를 적당히 메꾸고 빈둥빈둥 보낸 사람들과 똑같이 궁둥이를 차 밀리"고 만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들뜨기 시작하고 잇몸이 퍼렇게 부풀어 이뿌리가 드러났을 때, 결국 모조리 빼고 틀니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낭패감보다 심한 배반감과 노여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 위장을 비롯한 몸의 모든 기관이 무력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화자의 상실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잘 먹는 것이야말로 건강의 척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잘 먹는 것의 시작은 이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이를 잃고 틀니를 착용한다는 사실, 그 이물감에 익숙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노화와 관련하여 자신감을 상실케 하는 엄청난 삶의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의 부부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큰 상실은 아들 영로의 죽음이었다.

아들의 앞선 죽음은 아내가 "청대처럼 자라던 아들을 죽이고 머리가 온통 세어"버릴 만큼 큰 상실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소설 '동경'의 주제와 밀접한 상관이 있지만 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또 하나의 추력은 부부와 이웃집 여자 아이 사이의 갈등이다. 소설의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브레이크 장치를 움켜쥐고 가속도에 몸을 맡겨 비탈길을 내려오는 아이의 얼굴은 긴장으로 조그많고 단단하게 오므라들어 있었다. 짧고 꼭 끼는 면바지 아래 종아리도 팽팽히 알이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은 터질 듯한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이는 틀니에 감추어진, 꺼멓고 문드러진 잇몸의 누추와는 대비가 된다. 소설에서 지속되는 부부와 이웃집 여자 아이와의 대비와 갈등은 넘치는 생명력과 노년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한 낯섦에 빠져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화자에게 그 생명력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잠에 빠지는 과정은 언제나 어둑신하고 한없이 긴 회랑을 걸어가는 것과도 같았다"는 화자의 생각은 상실을 넘어 소멸에 대한 조바심이 느껴진다.

이는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흉몽에 시달리셨다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고 했어요"라고 말하면서 밀가루 반죽을 만져 "맥이라던가, 나쁜 꿈을 먹는 짐승"을 빚는 아내의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나이가 들어 노경에 접어들면서 부부가 가지는 조바심은 아들 영로의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영로를 묻었을 때 그는 그가 묻고 돌아선 것이, 미쳐가는 봄빛을 이기지 못해 성급히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가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이라고 생각했었다." 화자가 박물관에서 토우와 구리거울, 즉 동경을 본 뒤에 했던 생각으로 죽은(아마도 시국과 관련, 시위로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아들의 꿈을 계속 꾸며 "그 애가 죽었어도 우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라고 자책하는 아내의 생각과 함께 아들의 죽음, 즉 소멸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박물관에 있는 동경이 생명력을 다한 소멸을 상징한다면 소설의 후반부에서 부부와 갈등을 유발하는 여자 아이의 유리 거울(만화경을 만들)은 생명력을 상징한다.

여자 아이가 비추는 "거울 빛의 반사가 잠시, 천장으로 벽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마침내 유리컵에 머물고 밖의 빛으로 어둑신하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물속에 담긴 틀니만이 홀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밝고 명석하게 반짝거렸다."

다소 모호한 소설의 결말이다. 그 모호함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알 듯도 하지만 그 의미를 글로 표현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보다는 소설 속의 이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늙은이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을 요구하는 어떤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경에서 하는 소멸에 대한 조바심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소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강박에서 생기는 것이리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살아갈 날이 점차 줄어간다는 것, 곧 소멸을 일상으로 느끼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덧 나도 그럴 나이가 되었다. 아직 노인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노경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은 생을 조바심을 내며 살고 싶지는 않다. 언제나 내일을 꿈꾸며 살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서재에서의 소설가 오정희(1947~ )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3화마주 보는 시선에서 세상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