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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고 영원한 안식을

-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by 밤과 꿈

일 년 전 후배 C가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C의 장례를 치른 후에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고인의 아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배 K의 연락처를 발견, 뒤늦게 부음을 알렸고, 선배는 이를 단톡방에 공지, 비로소 C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더러 고인의 아들 계좌로 조의금을 보내곤 했다는데 나는 망자를 떠나보내는 마음의 성의조차 표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교체하는 와중에 단톡방에서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달도 더 지나 C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사실 C는 내 대학 생활의 거의 절반을 공유한 사이다. 함께 서울 시내의 음악다방을 섭렵하면서 음악을 듣고 음악을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둘 다 슈베르트의 가곡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대화가 잘 되는 편이었다. C가 재수를 한 까닭으로 선후배라기보다는 동갑의 친구로 지냈다. 1980년대 초 잔뜩 주눅이 든 대학 분위기에서 C나 나에게 음악은 쉴 만한 안식처였다. 그 시절, 새로 들어선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대학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위축되었고, 사회문제나 정치에 관심이 있든 없든 우리는 시대의 영향으로 괜히 주눅이 든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음악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설혹 그 위안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기 위한 도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음악이라는 고귀한 예술에 몰입했던 시간들이 나에게는 소중한 순간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시대의 많은 젊음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빠져 있었다. 외부에서 부르기를 운동권의 일원이 되면 끊임없는 고민과 긴장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사람들은 운동권 학생들의 행동을 젊은 혈기와 정의감으로 이해하겠지만, 운동권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 생활에는 마음에 안식보다는 긴장 만이 함께 한다.

이때 음악은 나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사회과학과 역사 서적이 주를 이루는 독서 또한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어서 마음의 안식을 구할 수는 없었다.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초상


앞서 언급한 것처럼 C는 음악에서 함께 안식을 구하고 나누던 사이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C가 자신의 문제로, 그러니까 다니던 대기업을 구조조정으로 퇴사한 후 겪게 된 생활고로 스스로 알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진 까닭이다. IMF 구제금융의 파고가 드높았던 그 시절에 곤란을 경험한 사람이 한둘이겠느냐마는 워낙 잡초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가진 친구라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C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인 르네상스에서 DJ로 일한 적이 있었다. C가 대학원을 다닐 때로 주거가 불안정했던 C는 음악감상실 내에서 매일 잠을 청했다. 물론 취식이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퇴근 후 다시 돌아와 몰래 잠을 자는 생활을 꽤 오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오디오도 없으면서 당시로서는 신문물인 CD로 독일 가곡 음반을 이백 여장을 사서 모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아직 직장을 다니지 않고 배움을 이어가고 있었던, 그래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C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이백 여장의 CD가 포장된 비닐조차 뜯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해하기 힘든 C의 수집벽은 단순히 음악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는 힘겨운 삶을 견디는 의지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C가 독일 가곡에 빠져들기 전, 고등학생일 때부터 즐겨 듣던 음악이 있었다. 바로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라는 곡으로 쇼팽의 대표적인 곡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낭만적인 선율이 돋보인다. 원래 독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지만 관현악 파트의 수준이 미흡해 피아노의 독주로만 연주하거나 아예 관현악 파트가 있는 폴로네이즈를 생략하고 안단테 스피아나토(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부분만을 연주하기도 한다.

나는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를 들을 때마다 후배 C를 생각한다. 그의 삶과 안타까운 죽음을 돌이켜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암울했던 시절에 음악에서 위안을 얻고 안식하고자 했던 것처럼 천국에서도 쇼팽의 음악처럼 무엇에도 쫓기지 말고 평안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되기를 바란다.



https://youtu.be/oS_XjkILFMY?si=DnA-gmgb-oVpjT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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