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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 May 24. 2022

이름을 짓다, 이름처럼 산다

저는 채송아입니다.

또 시작이다. 남자아이들이 놀려먹고 싶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초등학생 시절, 새 학기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이름을 말하면 어김없이 내 이름은 남자아이들의 놀림거리 단골 메뉴가 되었다.


화장실을 가려 복도를 나서면 남자아이들 몇 명이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갑자기 송아지 노래를 불러댔고, 재미도 없는 “너희 언니 이름은 봉숭아지?”라는 질문을 해놓고 자기네들이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는다. 그뿐이랴.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겠다 하면서 “아빠하고 나하고~채송화도 봉숭아도~” 노래를 불러제낀다. 동요에 나를 위한 주제가가 왜 이리 많은 것인지…. 생각해보니 오히려 나이가 든 지금, 마음이 더 여려진 것 같고(그건 나이 탓인가?), 그때는 나름의 깡다구가 있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하고 그들의 놀림을 무시했던 것 같다. 너희들은 짖어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모드로 말이다. 그렇다고 속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엄마한테 왜 내 이름을 이렇게 지어주셨냐 묻곤 했으니 말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놀림보다는 출석부상 가장 눈에 띄는 이름으로, 아무도 발표나 답을 하지 않거나 질문이 없을 때 그 적막을 깨트리기 위한 선생님들의 1순위 간택 자가 되었다.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경우야 상관없었지만, 억지로 그것도 갑자기 답을 해야 하거나 질문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 앞에서는 튀는 이름이 원망스러웠다.


출처_pinterest

70년대 후반, 돌림자도 아닌, 더구나 한자 이름이 아닌 순한글 이름을 딸에게 지어주신 부모님이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꿈꾸는 문학소녀였던 친정어머니의 영향이셨으리라. 어릴 적 동네 화단에서 흔하게 본 앉은뱅이 꽃 채송화. 영어 이름이 Rose moss일 정도로 이끼처럼 줄기가 땅에 붙어 옆으로 퍼지는 이 꽃은 아주 예쁘진 않지만, 빨강, 노랑, 자주색 등 다양한 색의 나름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꽃이다. 어머니는 오빠는 장손이라 돌림자를 넣었지만, 딸인 나에게만큼은 예쁜 꽃 이름을 지어주고 싶으셨단다. 하지만 이름에 ‘화’가 들어가는 것은 옛 시절 기생 이름에 많았다 하여 ‘아’로 바꿔 나의 이름은 채송아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처럼 내 이름은 그렇게 쉽게 피지 않았다. 이름을 물어 답하면, “최성아”, “최송화”라며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고, 난 늘 '채소 할 때 채'라고 강조했고, 그나마 채시라 배우가 한창일 때는 그녀의 성을 불러들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항공사에서는 신입사원들 대부분을 고객 접점부서에 배치했다. 처음 발권 업무를 맡게 된 난 온종일 고객을 전화로, 대면으로 수없이 만나야 했다. “아름다운사람들 OOO 채송아입니다.” 하면 “뭐가 죄송해?”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고 나도 모르게 처음부터 죄송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이렇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냐는 질문을 “언니 봉숭아지?”라는 말보다 훨씬 더 많이 듣고 있으니, 어머니가 지어주신 나의 이름이 본연의 색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출처_pixabay

그리고 중국어 배우는 붐이 일었던 시기. 배워놓으면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되겠거니 하고 출근 전 다닐 중국어 학원을 등록했었다. 첫 시간, 자신의 이름을 중국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선생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알려주시는데 나에겐 말할 한자 이름이 없다. 선생님께 다음 시간까지 ‘이름을 만들어오겠다.’ 했다. 그때 알았다.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옥편에서 찾은 ‘송’과 ‘아’에 해당하는 한자들을 쭉 늘어놓고 오랜 고심 끝에 꼭 마음에 드는 내 이름을 지었다. 특히, ‘송’의 한자에 소나무 송을 택하는 데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松(소나무 송), 娥(아름다운 아). 제 이름은요, 아름다운 소나무입니다. “워 지아오 차이 쏭 으어”. 그리고 그때부터 온라인상에 나의 모든 아이디는 아름다운소나무, sweetpine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도록 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하쿠의 말이다. 주인공 치히로(헤아릴 수 없는 깊이)는 금지된 신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마녀가 운영하는 온천탕에서 개명을 권유받고 ‘센’(숫자 1,000)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게 된다. 결국, 하쿠의 도움으로 그가 꼭 지키라는 이름도 찾고 부모님을 구해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을 지킨다는 의미일 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로 불리는 이름. 그 안에 나를 담는 이름. 치히로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라는 뜻의 이름을 찾게 된 것은 단지 잃어버린 ‘내 것’을 돌려받았다는 그 이상인 지금껏 살아온, 살아갈 '나와 나의 이야기'를 찾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 전 열린 싸이월드에는 젊고 팽팽하고 얇은 내가 있다. 사진 속 내가 부럽기도 그립기도 하나, 한편으론 40대 중반의 내가 가져가야 할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름의 의미처럼 살아가자고. 꽃(채송화) 같이 낮은 자세로 작지만 세상에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 내 자리에서 굳건히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지키는 ‘채송아'. 그런 의미를 담은 나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닮은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적어도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지인이 아이 학교에서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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