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와 아들의 할머니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할머니
할머니는 몇 살부터 할머니라 불러야 할까?
손자나 손녀가 있으면 할머니인 걸까? 하지만 길에서 어르신들을 보게 되면 내 할머니가 아니어도 할머니라 부르기도 한다. 그분의 손주가 아니어도 말이다. 그러니 모습에서 저절로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기억 속의 나의 할머니는 지금은 생각해보면 할머니라 부르기도 민망할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내가 막 국민학교(당시는 그렇게 부르는 때였으니)를 졸업할 즈음 어느 날 갑자기 살던 집 마루에서 쓰러지시고 몇 시간 내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 모든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친할머니였는데 우리와 그리 긴 세월은 아니었으나 함께 사셨다. 난 외할머니가 없었다. 그러니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함께 몇 년을 보내고 운명하시는 모습까지 모두 본 친할머니가 전부이다. 그래서 할머니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모습은 그 할머니인 것이다. 지금은 누가 봐도 할머니로 불리지 않을 나이셨는데도 말이다.
당시 나의 할머니는 요즘처럼 화려하지도, 개량되지도 않은 노색의 한복을 매일 입으셨다. 숱이 거의 없어져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머리를 매일 아침 참빗으로 정성스레 모아 빗어 겨우 쪽을 지으셨다. 어릴 적 눈에도 별로 값나가 보이지 않던 비녀를 찔러서 만든 쪽머리가 매듭처럼 머리 뒤에 겨우 붙어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함께 사시며 큰소리 한번 내는 적 없던 할머니는 매일같이 손주들 챙겨주시고 묵묵히 집안일을 도와주셨고 착하디 착한 분이셨다. 옛 사극에서나 나오는 여인네처럼 남편이 돌아가시고는 장성한 자식을 따르는 여인의 모습으로 사셨다. 그렇게 나의 할머니는 세상이 바뀌던 시절 옛 모습으로 남아 시대를 살던 그분이 나의 할머니였다.
남편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아들에게는 나의 엄마인 외할머니가 전부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한국은 곧 할머니가 계신 외갓집이다. 몇 년에 한 번 가게 되는 한국은 가장 가고 싶고 신나는 곳이다.
아들의 할머니는 가끔 보게 되는 손자에게 요즘 할머니답게 경제력을 포함한 사랑을 표현하셨다. 자주 보지 못하는 손자였기에 더 애틋했나 보다.
매년 어린이날이면 미국에서는 아이가 알지도 못하는 날인데도 손편지로 감싸 100불 한 장을 봉투에 넣어 보내셨다. 우편물이 중간에 분실되면 어쩌냐는 내 잔소리에 그래도 할 수 없다시며 몇 번을 보내셨다. 내게 전해주라 해도 되지만 아마도 아이가 직접 받는 기쁨을 주고 싶으셨나 보다. 하지만 손주는 까막눈 겨우 면한 한글 수준으로 할머니의 손편지를 다 읽어내기 힘들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선 한국과 달리 아이가 스스로 돈 쓸 일도 없어 손편지 속에든 현찰도 아이를 흥분시키진 않아 보였다. 그래도 아이는 가끔씩 우편함 속에 자신의 이름으로 오는 할머니의 편지를 받곤 했다.
아들이 대학으로 떠난 후 어느 날, 방 정리를 하며 아들 책상 서랍 깊숙이 모아놓은 그때의 봉투를 발견했다. 낯익은 엄마의 글씨가 있는 편지였다. 한글이 서툰 아들이 다 읽지 못했을 것 같은 손편지와 함께 할머니의 마음이 그대로 아들에게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한테도 이젠 한국에 더 이상 외갓집이 없다. 물론 여전히 떠듬거리긴 해도 읽을 한글편지를 보내줄 할머니도 안 계신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엄마는 그렇게 이제 아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계신다.
나도 언젠가 감사하게도 할머니라 불리는 날이 오게 된다면 내가 뿌린 작은 조각들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 속에 남을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오래도록 기억해 줄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