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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Mar 05. 2020

'교열걸'은 왜 매력적인가

일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를 보고

6년간 한 곳 출판사에 원서를 넣었고 매번 낙방했다. 유명 패션잡지 '랏씨'의 애독자 코노 에츠코. 이 잡지 편집장을 꿈꾸기 때문에, 이곳이 아니면 의미 없단 생각이었다. 심지어 올해엔 관련 인원을 안 뽑는데도 무턱대고 찾아갔다. 열의 가득한 그녀는 면접관 옷을 논평하는 놀라운 패기마저 보여주었다. 무례로 비칠 수 있음에도, 해박함에 감탄한 면접관이 그녀를 발탁한다.


'랏씨' 편집부는 아니었다. 건물 지하 구석의 교열부였다. 책의 출판을 앞두고서, 오탈자 수정, 팩트체크 등의 일을 하는 부서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책 만들기의 필수과정을 담당하는 곳. 면접관이었던 부장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엔 편집실이 아니어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처음의 불평은 온데간데없고 이내 업무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면서 출판의 과정, 회사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기 시작한다. 그녀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일처리는 굉장히 적극적이다. 작은 디테일 체크를 위해 출장 다니는 일 다반사다. 어떻게든 인정받아 편집부로 가려는 노력이다. 이 몰입이 멋있다. 결국 교열 업무를 좋아하게 된다. 이 변화, 더 멋있다.


납득 안 되는 일에는 맹렬하게 문제 제기를 한다. 자기 생각이 분명한, 확실히 튀는 인물이다. 이런 경향은 패션으로 표출되는데, 매 세련된 차림의 모습에선 자기표현의 건강한 욕구가 엿보인다. 패션에 대한 애정이 한순간도 식지 않는다. 꼼꼼하고 세심한, 교열에 특화된 듯한 옆자리 동료. 에츠코는 분명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이것을 잘 아는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것을 놓지 않는다. 코노 에츠코 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꾸미고 포장하려 했다면 그녀 답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이다.


일드 특유의 교훈적 정서가 있다. 교열부에서의 시간은 성장을 위한 수련과정이란 해석이 그럴듯하다. 주방 청소 1년, 재료 손질 3년을 거쳐야 비로소 칼을 손에 쥐게 된다 뭐 그런 얘기 비슷. 그녀의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눈에 밟히는 건 내 삶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직 변변찮은 위치에 있지만, 부족한 능력으로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힘든 시간이 많았다. 10~15년 적지 않은 걸 포기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돌아보면 아득하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 고통스러웠던 때를 잊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지금에 도달할 순 없었을 것이니,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갈 길이 멀다 할지라도.


에츠코에게서 애틋함을 느낀다. 주변 인물들도 그랬는지, 늘 그녀를 돕는다.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교열부장, 티격태격하나 속 깊은 '타코'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 외 직장 동료들, 따뜻한 말로 위안을 주는 하숙집 주인. 언제나 응원하고 힘이 되는 친구들도 빼놓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때를 기다리는 중'인 모델 지망생 연인도 중요하다. 그에게 일이 잘 풀릴 거라 용기 주는 말이 꼭 그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 등장인물 모두가 꽃 피지 않은 누군가를 이끌어 주고 있다. 교열과 닮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에 책이 나오게끔 묵묵히 돕는 일. 화려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 교열의 한 측면을 이렇게 발견한다.


결국엔 잡지 편집부로 간 에츠코. 새 부서로의 배속은 누가 봐도 노력의 대가다. 교열이라는 일, 어떤 대상(책)이 밖으로 드러나게 돕는 일이, 자신이 새로 드러나도록 이끄는 일로 귀결되었다. 패션잡지 편집은 누가 봐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교열도 못지않게 가치 있다. 하찮아 보이더라도 자기 일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고, 그러다 보면 새 길이 열리기도 한다. 에츠코가 정말 멋있다. 그녀의 사는 자세는 누구라도 응원하고 싶게 만든다. 당장 하는 일이 희망하던 것과 다르더라도, 애정하는 대상을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태도. 패션에 대한 애정은 다시 봐도 놀라울 정도다. 방에 수북이 쌓인 '랏씨' 과월호들 좀 보라! 이런 열정은 학벌로도, 시험으로도 평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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