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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Nov 21. 2023

그 아이는 커서 아무나 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어린 시절 예쁜 척을 아주 잘하는 아이였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이모부를 만날 때면, 이모부를 따라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을 오므려서 턱선에 받치고 있는 사진,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 등등. 게다가 핑크색으로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까지. 지금 보면 포토제닉 그 자체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멋쟁이 초등학생이 되었다. Y2K가 유행하던 그 시절,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엄마와 함께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초3 박혜민은 샛노랗고 딱 붙는 위아래 투피스 츄리닝 같은 것을 사입었다. 내 기억으로는 후드자켓에 비즈 같은 게 박혀있었다. 렉시, 길건의 발톱 정도는 따라갔던 것 같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이 성향은 사실 엄마 경옥씨로부터 물려 받았다. 초3 딸이 핏한 투피스 츄리닝을 사달라고 할 때, 잘 어울리니 사도 된다고 흔쾌히 지갑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당신 눈에 안 어울린다 싶으면 가차 없었다). 그런 경옥 씨는 30대 초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 상하이로 남편 따라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집에 있기 도무지 심심했는지, 아니면 돈을 벌 심산이었는지 몰라도 한국에서 귀걸이, 목걸이 같은 악세사리를 떼다가 집 인근에 있는 백화점 1층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 살이 내내 성실한 공무원으로 살았던 경옥씨가 악세사리를 잘 팔았을 리 없다. 대량으로 남은 악세사리는 그렇게 우리집 창고에 그대로 쳐박혔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짐더미가 나에게 발견된 것이다. 나는 이민 가방을 가득 채운 악세사리를 하나하나 뒤집어 보며, 마음에 드는 악세사리들을 2단으로 된 나의 ‘최애’ 핑크색 통에 차곡차곡 담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수치스러워서인지 몰라도 중간 기억들은 다 생략되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통에 담긴 악세사리들을 학교 다른 여학생들에게 팔았다. 그것도 여러개.


쉬는 시간 미리 구매 의사를 밝힌 친구와 복도에서 접선했다. 나는 까르띠에 직원 마냥 왼쪽 손으로 통을 받치고, 오른쪽 손으로 통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전시, 아니 놓여진 악세사리를 그에게 내밀었다. 손님, 아니 친구가 마음에 드는 악세사리를 고르고 나면, 꼬깃해진 중국 지폐를 내밀었고, 나는 그걸 빳빳하게 펴서 이미 두둑해진 지갑에 채워넣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지금으로 치면 큐레이션 커머스업을 영위했던 거다. 게다 원가 대비 한참 높은 웃돈을 주고 팔았으니 장사 수완이 어찌 보면 경옥씨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어떤 학부모가 이 사실을 알고 우리 엄마에게 전해서 나의 사업은 강제 폐업 당했다. 그 때 내 나이 초4, 11살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공부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하라고 해서 한 공부인데 반 친구들보다 성적이 잘 나왔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한 덕분이었는지, 처음으로 참여해본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역시 나는 좀 특별한 사람이었어. 기세를 몰아 전교 부회장 출마를 선언했다. 유일한 여자 후보였다. 나는 이전까지 다른 후보자들이 택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 위해 그림판으로 디자인한 손바닥만한 명함을 집에 있는 프린터로 출력하고, 일일이 잘라서 두꺼운 색지에 붙이고, 집에 돌아다니던 아빠의 명함 크기대로 다시 잘랐다. 다음 날 점심과 쉬는 시간 복도에 서서 전 날 만들어둔 수제 명함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나의 홍보 포스터에 조그만한 주머니를 붙여서 거기에 몇 장 넣어두기도 했다.


거기서 만족이 안되었는지 영어 잘하는 티를 여기저기 내고 다녔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영어학교를 다닌 덕에 전학한 학교에서는 내가 영어를 좀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영어 발음을 굴리며 엄마 아빠 발음을 자주 지적했는데,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서야 엄마는 그 때 재수없었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러던 중 집안 사정이 차츰 나아져서 다시 영어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순조롭게 영어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순번을 기다리다가 초6 2학기가 시작되던 날, 영어학교로 등교했다. 천연잔디가 깔려있는 드넓은 학교와 각종 수업 도구들, 맛있는 급식과 고급스러운 방과후 활동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감에 가득 찼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원래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집 바닥에 드러눕고 울었다.


왜냐하면 이전 학교에 있을 때는 내가 공부도 제일 잘하고, 영어도 제일 잘하고, 친구도 제일 많았는데, 여기서는 내가 공부도 못하고 영어도 못하고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학은 절대 안된다는 부모님의 단언에 이내 포기하고, 어느새부터인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게 학교생활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공부는 점점 원래 페이스로 돌아왔고 학생은 공부만 잘하면 됐기 때문이다. 무난하게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고, 대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고, 첫 회사에 입사를 했다.


회사에서도 무난하게 적당한 칭찬을 받고, 가끔 맛있는 걸 먹으면서 회식을 하고, 자유롭게 휴가를 썼다. 주변 사람들은 “나이 치고”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데 왜인지 자주 공허하고 성에 차지 않았다. 핏한 노란색 추리닝 대신 핏한 검정색 정장을 입고, 중요한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 받으며, 거래를 하는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했던 걸까.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정말 이게 끝인가? 이게 다인가? 무언가가 더 있는데 내가 모르는거겠지 싶어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나서서 하고, 상사가 해야 되는 일을 내가 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공허함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저녁 6시반, 여느 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 후 택시 뒷자석에 널부러져 무심하게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고 있었다. 남들 모두가 퇴근하는 시간에 퇴근한 탓에 택시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면서 멈췄다 섰다를 반복했다. 차 멀미에 취약한 나는 이내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해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내리고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택시는 왼쪽에 한강을 두고 강벽북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해가 지평선과 건물 사이사이를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어. 내 인생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어.


사진기 앞에서 예쁜 척도 잘하고, 꾸미기도 잘하고, 장사 수완도 있고,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던 내가 왜 이렇게 된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인지 인생이 퇴화한 느낌이 드는 걸까. 슬픔이 몰려와서 코끝이 시큰해졌다. 누가 보면 저녁 노을의 낭만에 취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할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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