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산책길
어르신들이 한 데 모여 각자에 맞는 기구로 운동을 하고 계신다. 강도가 높거나 열기가 뜨거운 광경은 아니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멋지고 대단해 보인다.
운동기구가 놓여 있는 공간 아래로 널찍한 간격의 아치형 돌계단들이 놓여 있다. 연인, 가족, 친구관계로 보이는 다양한 조합의 사람들이 호수를 보며 대화를 나눈다. 올해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토요일의 따스한 순간을 담기 위해 모인 듯했다. 맑고 푸른 날씨에 사람들의 온기가 퍼지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까 싶다. 우리 가족도 모처럼 새로운 곳에서 긴 산책길을 나섰다.
뚜벅뚜벅 유아차를 끌며 천천히 걷는데 하나도 춥지 않다. 우거진 나무들과 빛으로 데워진 호숫가의 온도가 포근하게 전해진다. 우측통행길 사이로 인파가 몰려들며 수평으로 빼곡한 작은 언덕을 오르는 것만 같다. 맞은편에는 일찌감치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느긋함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내와 끊기듯 건네는 대화들은 굳이 뜻이 분명하지 않아도 즐겁다. 어제까지만 해도 투박했던 감정들이 사그라들고 마음이 녹는다.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얻기 위한 치열함은 생각보다 별 것이 아니었다.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지가 삶의 풍요와 행복의 기운을 단숨에 바꾸는 것 같았다.
우연한 기회로 들렸던 곳에서 시월의 최고의 날을 얻었다. 아내와 보폭을 나란히 하며 걸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이가 유아차에 누워 말없이 풍경을 보며 잠든 적이 언제였을까. 우리에게 놓인 현실의 고민을 내려놓고,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만을 바라봤던 적이 언제였을까. 낡고 오래된 추억처럼 만들어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쉽게 소중한 순간들을 외면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만족을 얻었고, 나아진 인생으로 옮겨졌던가.
옆으로 누운 U자형 산책길은 낮의 해가 비추는 원리에 따라 한쪽은 빛을 머금은 늦은 여름의 길을, 다른 한쪽은 그늘이 가득한 초가을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산책을 시작한 후 중간 지점까지 꽤 길어 보였던 길은 돌아가는 길이 시작되자 파이널 스퍼트의 기분을 느끼라는 듯 급격히 짧아지고 있었다. 걷다 보니 생긴 기운과 산책할 만하다는 생각이 키워낸 자신감 덕분에 경보 선수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목적지가 보일 때쯤 거위들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전해졌는지 물가에 있던 두 마리가 갑자기 코앞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을 많이 봐 온 탓에 스스럼이 없어졌나 싶었는데, 옆에서 과자 몇 개를 보이며 손짓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꽤 즐겁게 들리는 소리로 과자를 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거위들이 신기했다. 과자를 먹으면 배탈이 날 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딸은 어느새 깨어나 고구마깡을 몇 개를 꺼내 들더니 거위와 눈빛을 주고 받고 있었다.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실천하며 부랴부랴 산책을 마쳤다. 올해의 마지막 Shining day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