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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Mar 30. 2022

속물이라고 욕했다

아침에 외출을 하는데 건물 사이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아래로 회색 연기가 이어지고 있었고 도심 방면이었으므로 불을 피운 게 아니라 화재인 게 분명했다. 가까운 곳은 아니었고 옆동네쯤 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서 2km 떨어진 동네였다) 내 차가 교차로 한 두 개 지날 때쯤 금방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오후가 돼서야 불이 난 곳이 산부인과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120여 명의 산모와 아기가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산부인과 구관에서 난 불은 인접한 숙박시설까지 태우고 진압되었다. 시내의 구급차와 소방차는 모두 온 것 같았다. 워낙 차량 통행량이 많아서 늘 번잡한 도로가 수송차와 가족들, 시민들까지 모여 더욱 복잡해졌다. 근처를 오가던 사람들이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리는 바람에 나는 신문 기사보다 먼저 사실을 알게 됐다. 대도로변에 있는 건물에서 난 불인데 골목 안의 숙박시설까지 불이 옮겨 붙었다는 이야길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친정 엄마였다. 친정은 불이 난 병원에서 불과 6-700m 떨어진, 도보로는 겨우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방향도 불이 옮겨 붙은 곳 쪽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쉬이 진화되지 않았으면 골목을 따라 엄마 집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 엄마께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매캐한 냄새가 한참 동안 났노라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나니 어딘가 켕겼다.


사망자는 없지만 연기를 흡입해 대학 병원으로 옮겨진 사람이 있고, 안전해야 할 새 생명들과 엄마들이 강제로 전원(轉院)됐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겨우 매캐한 냄새가 날 뿐인 친정 엄마에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로 위로하는 나 자신에게 참기 어려운 경멸이 일었다. 그게  무슨 경멸까지 일어날 일인가, 가까운 사람을 더 많이 걱정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닌가? 아니, 나는 내 마음의 검은 구석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재산상의 피해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엄마의 안전과 관계없이 나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곧장 내가 치사하게 느껴졌다. 나는 속물이었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끝에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을까? 나는 아니다. 책임져야 하는 가족의 안전과 안위가 고장 나는 순간, 평범한 내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천천히 조각나기 시작한 삶이 이전으로 복구되는 데까지는 하세월이며 그것을 감당하면서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 앞에 맥없이 넘어질 때가 많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도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가족이 또 생긴 마당에 홀로 결정짓지 못하는 많은 일들로 눈치 보는 날이 잦아졌다. 반복해서 친정을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남편이 '웃으면서 좋다고, 그러자'라고 해도 이상하게 내가 작아지면서 자격지심이 생기는 일이었다. 어딘가 뭉쳐 있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 내 마음의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천히 회한의 소용돌이가 인다.




결혼  3개월 하고 열흘이 지난 어느 , 친정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때도 화재였다. 아버지는 3 화상을 입고 서울에 있는 전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엄청나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빚은 당시 짓고 있는 대규모 펜션 단지만 완성되면 탕감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감에  있었다. 아들 학비를 걱정하는 아내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우리를 덮쳤다.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뒀다. 엄마는 남편 회사의 재무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진행되던 사업은 공중분해됐고, 엄마와 나는 빚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나보다는 엄마가 특히 심했다. 아버지는 사망 보험도 없었다.

그 후 엄마는 온갖 치욕과 비난 앞에 홀로 섰다.


한 번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어딜 운전해 가고 있노라고 빨리 끊자고 했다. 운전하면서도 스피커로 곧잘 통화를 했는데 그날만큼은 어딘가 어색한 말투로 통화를 종료하는 엄마가 걱정됐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를 믿고 아빠에게 사채를 빌려준 최의 부탁으로 마산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최는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없게 되자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와서 운전을 해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는 그렇게 10년을 넘게 살았다. 빌기도 많이 빌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구했다. 친척들은 우리와 연락을 모두 끊었다. 빚쟁이들은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전화를 걸어서 신세 한탄을 했다. 엄마가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엄마는 10년 동안 아예 통장을 만들지도 못했고, 집도 없고, 전세금도 없었다. 주거형 오피스텔을 가진 친구가 도와주어서 겨우 살고 있었다.


그런 엄마도 생활은 해야 했다. 엄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뿐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남편이 장인을 잃은 장모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얼마간의 생활비가 고작이었다. 내 동생은 학교를 중퇴하고 군대를 갔고 그 와중에 나는 출산을 했다. 젖먹이 아이를 기르면서 아등바등 살기 바빴다. 결혼과 출산에 적응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었다. 엄청난 부채를 떠맡아야 했다. 내가 '결혼을 그렇게 빨리 하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거'라고 말하던 엄마의 말이 상처가 돼서 밤마다 울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공중에다 주먹을 휘젓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 아기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 가끔은 그렇게 생각했음을 들킨 것 같아 미안해서 더 울었다. 캄캄한 굴 속에서 우리 모두는 헐뜯고 비난하다가 미안해하다가 돕다가 그랬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을 견뎠다.


빚은 여러 군데서 탕감되거나 유예되었다. 갚을 수 있는 것은 있는 힘껏 갚았다. 여전히 엄마의 생활은 우리가 돕지 않으면 안 됐다.  동생이 취직하면서는 정해진 액수의 생활비를 보태 주어서 숨통이 좀 트이긴 했다. 하지만 유류비, 교통비 같은 용돈 일속은 내가 감당했다. 엄마는 가끔 가전제품을 바꾸거나 자동차 보험을 갱신해야 했다. 모두 소모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큰돈이 들어가야 할 땐 입맛이 썼다. 엄마는 오랫동안 직업이 없었고 이제는 나이도 차서 이렇다 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점이 내내 눈치가 보였다. 같은 60대지만 여전히 회사를 다니면서 적금을 차곡차곡 붓고 있는 시어머니와 비교돼서 더 그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5년쯤 지나서 엄마도 일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가 엄마가 통곡한 적도 있다. 어쩌면 당연한 권유였는데도 나 역시 미안해서 밤잠을 설쳤다.


엄마가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엄마는 별것도 아닌 말에 꼬투리를 잡아 나를 곤욕스럽게 할 때가 많았다. 적은 돈을 하찮게 여기는 버릇이 있어 내내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10년쯤 지나자 슬픔도 고통도 옅어졌는지 국비지원을 받아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취업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하기도 했다. 물론, 나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취업의 문이 열리진 못했지만 이전에 비하면 눈부신 성장이었다. 교회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소정의 돈을 저축하기도 했다. 밤마다 손등과 종아리가 퉁퉁 부어서 결국 그만두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다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여전히 10년 전과 같았다면 나야말로 정신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지독히도 아픈 세월을 보냈다.


부지 간에 밀어닥친 사고와 이별의 후유증에 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죽지 않았고, 나도 이혼하지 않았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는 이런 마음을 여러 번 먹었다. 나는 진지하게 이민을 고려한 적도 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몇 번씩 맞닥뜨리면, 엄마고 동생이고 모두 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나름 끈끈한 우정으로 뭉쳐있다. 적은 돈이지만 서로 도왔다. 어려운 가계 경제 속에서도 서로 이해하면서 조금씩 맞춰가고 있다.


그러나 엄마에게 큰돈이 들어가는 일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내 남편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다. 미래를 계획하며 모아 두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기도 하지만 속상한 건 모른 체한다. 돕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엄마를 늘 도와줘야 하는 게 남편 앞에선 가끔 너무 민망하다. 그래도 결국은 사랑이 이긴다. 엄마를 너무 사랑하니까. 엄마는 나를 키우느라 변변한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 엄마도 홀로였으면 나보다 훨씬 부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속물성을 이리저리 탐구하다 보니 어느새 어두운 내 마음의 구석도, 엄마의 어쩔 수 없음도 모두 이해하게 된다. 속물적으로 생각하면 어때, 괴물은 아닌데!


불이 금방 꺼져서, 산모들과 아기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어서, 더 많이 불이 번지지 않아서 다 다행이다. 엄마와 내가 여전히 사이가 좋은 것도, 속물적인 마음이 들 때 결국엔 사랑을 택할 것임을 아는 것도 다 다행이다. 그리고 가끔 상처 입은 내 오래된 마음을 마주 볼 수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오늘만큼은 흠뻑 지질한 자기 비애를 칭찬한다.


모든 게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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