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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Apr 05. 2022

'실험 쥐 같다'는 말을 주의해 주세요

지난 주말에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유명 과학자가 게스트로 나와서 출연자들에게 본인 연구분야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저서는 베스트셀러고  역시 즐겨 읽었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좋아하는 과학자가 나왔으니 예고만 보고도 기대 만발이라 2주째 본방을 사수하고 있었다.


순간 불편한 점이 감지되었다. 게스트가 본인의 견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출연진들에게 이것저것을 묻는 와중에 출연자 중 한 명이 동료를 가리켜 '실험 쥐 같다'는 말을 썼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프로그램을 편집하는 사람이 그 말이 재밌었는지 아예 자막에 넣고, CG를 씌워 걸핏하면 출연자 얼굴을 쥐로 만들어 버렸다. 귀여운 귀와 코가 달렸다. 약 70분 러닝타임 동안 '실험 쥐'라는 말과 CG는 반복되었다.


나는 '전쟁 같다'라는 말을 싫어하고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세대 주제에 함부로 '전쟁'과 시끄럽거나 어지러운 상황을 비교해도 되는지 고민한다. 대답은 '아니'다. 전쟁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개인의 다툼이나 상황에 비견해서 사용할만한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실험 쥐 같다'는 말도 다르지 않았다. 실험 쥐는 귀엽게 찍찍거리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고문당하고 학대당하다가 버려진다. 쓸모가 없어지면 일부러 죽인다. 독가스를 맡게 하고, 화학 약품을 눈과 피부에 주사한다. 전기를 쏘이고, 자외선에 노출 시켜 쪄 죽인다.


동물 실험은 가학적이고 폭력적이지만 아주 잦게 행해지고 있다. 동물이 사람과 다른 종이라고 해서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꼭 필요하다는 말 뒤에 숨어서 말이다. 말을 못하고 도망치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을 모르고 자유를 모르지 않건만 인간은 과학 발달을 핑계로 수백 년 동안 동물을 학대해 왔다. 인간에게 유해한 제품을 걸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실험이라지만 실제로 꼭 필요한 실험보다는 업적을 위해 불필요하게 동물들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자주 있다고 한다.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저서 [동물 해방]*을 읽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학하게 동물들을 학대하고 있는지, 왜 그 실험들을 멈춰야 하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지금도 수많은 작은 동물이 세계 곳곳에서 실험대에 올라 있다.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무자비한 폭력의 실험실이다. 동물이 우리랑 다른 모습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그러나 그 습성은 비슷하다는 이유를 들어- 함부로 실험에 참여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면 언젠가 장애를 가진, 혹은 고아인 어린아이도 실험에 사용해도 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비약이 아니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인종이라고 선 긋고 함부로 실험하고 말살한 전력은 그다지 오래전 일이 아니다.


물론, 1970년대 미국을 필두로 동물 윤리에 대한 생각이 점차로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물 인권을 보호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동물을 실험하거나 직접적으로 신체의 일부를 취해 생산되는 상품을 찾아내 보이콧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MZ세대들이 미닝 아웃을 하면서 기업들도 착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겉으로라도 동물 복지에 가까운 상품 생산에 주력한다. 아쉽게도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때뿐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매스컴을 타면 슬쩍 관심을 갖는 듯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고 산다. 그래선 안된다. 평소에도 예민하게 굴어야 한다. 동물 복지나 동물 해방에 좀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래야 문화도 바뀌고 제도도 바뀐다. 문화를 바꾸는데 TV만 한 게 있을까? 반대로 미성숙의 관념을 심는데도 TV는 일조한다. 웃음을 가장한 차별의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중학생인 딸과 함께 보았다. 내가 분개하자 아이는 의아해했고 이유를 설명하니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실험 쥐'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이 땅의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주보는 연예인들 얼굴에 씌워진 귀여운 쥐 이미지로 지금도 고통에 울부짖을 어린 생명들을 같이 치부해 버릴까 봐 걱정됐다. 실험을 당해도 되는 어떤 동물도 없고, 함부로 죽거나 고통받아도 되는 생명은 절대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점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은 잘못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내 자식을 예뻐하면서 나와 다른 모양의 동물일수록 함부로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선 안된다. 학대의 정황을 알고 나면 주의해야 한다. 사용하는 단어, 쉽게 내뱉는 말부터 바꿔야 한다. 특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는 TV 프로그램의 생산자들은 좀 더 생명 중시를 생각해야 한다. 가족 전체가 볼 수 있는 시간대였고 우리나라 뇌 과학 분야의 저명한 교수님을 모시고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니만큼 아이들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한다. 제작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거나 상기시키는 말로 사회를 오염시킬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프로그램 관련자 누구라도, 신기해하면서 바라봤을 모든 과학 꿈나무들에게 '쥐가 실험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심겨 버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다면 출연진이 모르고 흘려버린 단어를 주워섬겨 활자로 박아두지 않았을 텐데. 그래픽까지 씌워 웃음 포인트를 만들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시인 박준은 본인의 산문집*에서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지만 어떤 말들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라고 했다. 말이 죽지 않고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살기도 한다면 글은 아예 가슴 복판에 새겨지고 머리에 저장된다. 글 생산자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그냥 지나갔겠지만 내 마음에 턱 하고 걸리고 나니 나는 어땠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 외의 다른 생명에게 상처를 남기지 말자, 세계를 오염시키는 글쟁이가 되지 말자. 다시 결심하는 시간이다.    







인용도서 피터싱어, [동물 해방](연암서가)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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