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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Mar 11. 2020

이사 가는 사람! 그러지 맙시다

좋은 이웃되기 어렵다

요즘 아파트들은 지하주차장만 사용하고 지상에는 아예 주차라인이 없다. 그런데 20년 된 우리 아파트는 그럴 리가 없다. 출입구 바로 앞에 대면 하도 이삿짐 때문에 빼 달라는 차가 많아서 옆 쪽에 댔다. 그러니까 내가 댄 쪽은 아파트랑 딱 붙은 산책길과 아파트를 가르는 펜스 옆 쪽이다.


아침 7시!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이미 일어났을 시간이지만 아이들이 방학인 데다가 출근도 자유로운 나는 한참 잘 시간이었다. 누군가 현관문을 부서지듯이 두드리길래 일어나서 인터폰을 봤더니 어떤 단발머리의 여자가 마스크를 쓰고도 다 알게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돌아서는 게 보였다. 나이는 40대쯤 됐을까. 그제야 자고 일어난 귀에 제법 큰 차의 공회전 소리가 들렸다. 무음으로 해두고 잔 전화기를 얼른 확인해보니 낯선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차 좀 빼주시겠어요?"

"아, 네."


다툴 마음은 없다. 이사는 가야 하는 것이고, 나는 하필 이곳으로 3개월 전에 이사를 왔고, 집이 1.2라인인 덕분에 끝에다가 자주 주차를 하고, 내가 잠시 살다가 나도 저렇게 남의 차 다 빼 달라고 하고 이사를 가게 될 것이다. 하필 우리 라인에 사는 사람이 꼭두새벽에 이사를 가는 것뿐이다. 화가 나도 할 수 없다. 늦잠은 나의 라이프스타일이고 꼭두새벽의 이사는 마스크 여자의 개인 사정이니까. 벌써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탓에 그냥 옷을 대충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아차, 나도 마스크 써야지.


차를 빼서 멀리 대고 다시 올라오려는데 1층에서 아까 그 인터폰 여자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엄청 화난 표정으로 뒤통수를 노려봤다. 14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고민했다.


"다른 집 사람들은 새벽에 이사면 전날 전화 걸든지 미리 얘기하든지 해서 이동 주차하게 해 놓는데 그냥 꼭두새벽에 남의 집 현관문 막 두드리시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빼주고 올라오는데 고맙다고 할 줄 몰라요? "


이렇게 쏘아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사실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뭐. 에이, 좋은 게 좋다고 이미 뺐는데 뭘 그런 말까지 하냐, 괜히 이미지만 버리지. 엘리베이터가 왔고 마스크 여자와 나는 차례로 탔다. 여자가 10층을 눌렀고 나는 8층을 눌렀다. 이쯤 되면 내가 그 집 사람이고 자기 집 이사를 위해 맨발 슬리퍼 차림으로 나갔다 오는 거란 걸 알았을 것이다. 나였다면, 건넸을 것이다. "차 빼주고 오셨죠. 미안해요. 새벽 이사여서 실례했습니다"라고 말이다. 어쨌든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었고 나는 최대한의 표현으로 슬리퍼에 화를 실어 직직 끌며 내렸다. 바로 다시 자고 싶었는데 화가 나서 잠이 안 왔다.



이사 오기 전 집이 너무 그리워졌다. 그 아파트는 신축된 아파트여서 거의 동시에 이사를 왔다. 이삿짐센터 차가 거의 매일  아파트 뜰을 가로질렀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지하에 주차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도 지하주차장에 안전하게 주차하고 뽀송하게 집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이들 문제로 다시 예전에 살던 동네로 돌아왔다. 전세가 잘 안 구해져서 이 아파트에 잠시 살게 됐다. 말이 잠시지 1년이란 시간은 짧은 것이 아니다. 살다 온 집에 비해서 턱없이 작았다. 오래된 아파트라  지하 주차장은 있어도 동과 바로 연결되지 않아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써야 했다. 짐이 많은데 지상에 주차공간이 없으면 낭패였다. 이삿짐 차가 서있을 법한 그곳에 짐을 대충 부려놓고 무섭다는 어린 딸을 '짐 지키는 역할'로 세워둔 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야근하는 남편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 전 아파트에서는 사람들끼리 인사도 잘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너도나도 눈을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 들어가세요'를 층마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여기 와서는 그렇게 인사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서로 쳐다보지 않는다. 스마트폰에 고정된 그 눈을 불가피하게 들어 올려 무엇하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부터가 그랬다. 나도 8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눈길 주지 않았다. 언제 한 번은 한 초등학생이랑 탔는데 내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작은 애랑 1학년 때 한 반이었던 친구였다. 우리 집에 와서 밥도 먹고 했는데 아예 바라보지 않으니 몰랐던 것이다. 어째서 아파트 탓을 하고 있었을까.




지잉 지잉 오래도 올라갔다. 사다리차도 아파트만큼이나 오래됐는지 소리도 요란하다. 어떤 짐을 가득 싣고 내려오는 이삿짐 사다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시끄럽게 굴었다.  더 오랫동안 살고 싶었던 옛날 집이 그리웠을까, 아주 어린 날 처음으로 이사 갔던 아파트가 생각나서일까. 마스크 불청객 욕을 실컷 하고 나니 문득 슬퍼졌다. 처지 비관에 심술이었다. 싸구려 자기 비애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스스로 말 못 할 우울에 젖어 있었다. 새집의 부푼 꿈을 안고 신도시를 이사를 했지만 사춘기인 큰아이가 적응을 어려워했다. 전학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 지금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곳에서 아이와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말할 길이 없다. 그렇게 결정해서 이사 온 거라면 모든 것에 만족했어야 했다. 원래 살던 동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금방 적응했고, 큰아이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는 자주 싸웠다. 집이 좁다고 싸우고, 층간소음이 심하다고 싸웠다. '너 때문이니, 나 때문이니'를 달고 살았다. 이웃을 향한 마음은 나부터 열리지 않았던 게 아닐까.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진창 속에 빠져있을 때는 머리 위 환한 햇살이 달갑지 않은 법이다.'라고 말했다. 내 마음이 진창이니 별 거 아닌 일에도 뾰족한 게 바로 나였다.  그래, 이사 가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자. 이유야 어쨌든 터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자리 잡다 보면 저 사람도 언젠가 다른 이웃에게 상처 받을 날 오겠지. 매너 없는 이웃에게 눈 흘길 날 오겠지.  달리 생각해보면 차를 빼 주고 돌아오던 엘리베이터에서 그 여자를 보지 못했다면 그렇게까지 화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싶었다. 우연은 타이밍을 가장해서 온다. 지지 말아야지. 그냥 한마디 안 쏴 붙이고 내린 것을 잘했다고 오늘도 한 박자 잘 참았다고 내 마음에 도장 콱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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