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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온 Jul 01. 2021

나를 조금 더 예뻐해주기로 했다

가스라이팅을 당한 후, 자존감 찾기

2021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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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게 가스라이팅일줄은 몰랐다]


"xx씨,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간 회사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것 같아".


이 한마디에 인터넷을 켜고 '회사 내 가스라이팅'을 검색해 보았다. 많은 예시들이 데이트 관련 예시들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내가 그 회사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이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안내서가 규정하는 가스라이팅 피해자 징후는 다음과 같다.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징후>

-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 스스로에게 "내가 너무 민감한가"라고 하루에도 여러 번 묻습니다
- 종종 혼란스럽고 미칠 것 같습니다
- 항상 파트너에게 사과합니다
- 좋은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더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친구나 가족에게 파트너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조차 표현할 수 없습니다
- 거절과 우여곡절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 간단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 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 더 자신있고, 재미있고, 더 여유로웠던
- 절망적이고 즐겁지 않습니다
- 마치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 자신이 "충분히 좋은 파트너"인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 출처: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안내서


위의 내용 중  85% 이상이 내 스스로가 회사에서 근무했던 기간 내내 시달렸고 고민했던 부분들이라, 온몸의 털이 쭈뼛 서버리는 듯 했다.


사실 처음엔, 다른 회사들보다 좀 많이 특이하긴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면 이정도는 겪을 수 있겠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처음엔 내가 예민한 줄로만 알았다. 이미 경력이 10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였기에 '내가 요즘 감이 떨어졌나?', '내 기억력이 왜이러지?' 등으로 치부하고 말았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점점 입맛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해도 대꾸 하기도 힘들어질정도로 무기력해짐은 물론, 자기 혐오에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일은 물론이거니와  "나는 잘 못해. 내가 하겠어? 아 힘들어" 이런 마인드가 일상 생활에도 녹아들다보니 이러다가 내 멘탈은 물론 사회생활마저 파탄날 것만 같은.. 얼음 위를 걷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고민하던 도중, 친구가 "나 사주보러 갈건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왔다. 평소였으면 거절했을텐데 그 날은 뭐에 홀렸는지 "응 그럴까?"하고 친구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다가온 내 차례. 시험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됐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생년월일과 한문 이름을 물어보신 사주 선생님께서 3-4분간 노트에 막 뭔가를 적으시더니, 고요한 적막을 깨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xx씨, 그간 많이 힘들었죠?"

"네?"

"작년부터 여러모로 일이 잘 안풀려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사람들때문에 너무 힘들고. 기본적으로 지금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많이 떨어져있어. 맞아요?"

"네 비슷해요"

"그 사람들 그렇게 케어해줄 필요 없어. 그만둬도 되고,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아요. 인생 안길어요. 지금 잠깐 쉰다고 해도 인생 안망해, 걱정 많아보이는데 걱정하는 일 안생겨요"


사주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이 대화 후에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솔직히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다만, "인생 안길어요. 잠깐 쉰다고 해도 걱정하는 일 안생겨요"가 그 날 하루 종일 머리속에서 빙빙 돌 뿐이였다.


[그랬다. 인생은 짧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집에 돌아온 시원한 물을 한껏 마신 후, 정신을 좀 차리고 생각했봤다.


인생은 짧고,

이 회사가 아니여도 어디선가는 뭐가 됐든 일은 구하면 되는 거고, 지금 나는 매우 행복하지 않다.


이 세가지. 너무 심플하고 명확하고 쉬운데, 왜 그간 몰랐던 것인가? 몰랐던 걸까 아님 외면하고 싶었던걸까? 아마 외면하고 싶었던거겠지? "조금 있으면 월급날이니 몇일만 더 참아보자, 재취업이 쉽지 않을테니 좀 더 견디자, 이정도 드러움은 참아야해"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었지만 결론적으로 지난 일년여동안 아프기만 했다.


장염이 몇번이나 찾아왔고, 결정적으로 퇴사 결심 일주일 전 눈에서 피가 났다. 월급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 몸이 망가져서 자꾸 더 망가지기 전에 구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이 보다 중요한게 어디있을까.


그래서 그냥 정말 이십대에도 하지 않던 일을 질러버렸다. 그 날로 부터 일주일 뒤, 나는 플랜 B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당연히 두렵다. 다음달부터는 막상 들어올 돈이 없으니 걱정되고, 이리 충동적으로 일을 벌일 수 있는 내가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라는 느낌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에게 조금 휴식을 준다 생각하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냥 정리하고 조금 쉬기로 했다. 다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나의 행보들에 내가 놀라지만, 내가 나를 애껴주지 않으면 누가 애껴주나 싶었다. 곧 또 구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테지만, 한두달정도 한량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나를 예뻐해주니 시작한 변화]


퇴사한 지 오늘로 딱 6주가 되었다. 백수가 되자마자 처음 한 일은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는것이였다. 그냥 조용한 영화가 보고싶어서 틀었는데, 정말 마음이 잔잔하게 위로가 되는 영화라 감사했다. 극중 김태리 캐릭터는 서울 생활에 지치고 했지만 정말 배가 고파 시골로 내려왔다고 했다. 근데 정말 놀랍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배가 고팠다. 그리고 내 위와 장에게 미안했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일하는 도중 책상에 앉아 배달음식을 시켜먹는게 고작이였던게 미안했다. 그래서 요리 솜씨는 없지만, 영화에 나왔던 요리들을 (요리 실력이 없어서 다 하지는 못하고) 몇몇개 따라해 보기 시작했다.


서툼이 많은 밥상이지만, 따뜻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니 눈물이 났다. 지난 5주간 최대한 꼭꼭 씹어 음식을 음미하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빨리 먹는데 익숙해져서 어려웠는데, 이젠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재밌고 갑지다. 이전에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음식을 먹었던 것인가?


또, 매일 30-40분씩 동네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별다를게 없는 작은 동네이지만, 어제는 저쪽길로 오늘은 이쪽길로 다니며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다. 이전에는 집 앞 카페에서 후다닥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일이 다였는데, 이제는 동네가 다르게 보인다. 이 길로 가면 1인용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저길로 가면 잔치국수를 참 맛나게하는 분식집이 있고, 5분 더 가면 동네 어르신들이 애용하시는 베드민턴코트가 있다는 정도까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일정 시간 햇빛을 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을 바라보니, 이 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점점 더워져와서 걱정은 되지만, 햇볕이 주는 비타민 효과는 지금까지 늘 달고 살았던 비타민 알약들보다 그 파워가 더 어마어마한 것 같다. 햇빛이 주는 행복감을 약으로 부턴 받은 적이 없으니..


퇴사 전에는 누군가를 만나는 거 자체가 일이고 스트레스였는데, 이제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름의 재미가 느껴진다. 그리고 만나는 모두가 똑같이 이야기 한다, "너 지금 되게 좋아보여. 앞으로도 그랬음 좋겠어. 행복해 보여 좋다"라고..


그렇다 난 많이 행복해졌고 긍정적으로 변했다. 단 6주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데 난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랬나 싶다. (아 사실 월급이 무서웠다. 월급의 위대함이란..)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이제 어느정도 회복이 된 것 같아서, 다시 밥벌이를 할 준비를 하려고 한다. 아직은 두렵지만, 뭐 사는게 다 복불복이고 행복반 불행반인거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신중히, 차근차근 알아보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회사가 나를 pick 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모든 건 쌍방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걸 너무 늦지만 이제 알았다.


나와 회사의 성공적인 상견례를 위해, 너무 급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알아보고 그에 맞추어 열심히 준비를 해보려고 한다.


지난 1년 가스라이팅인지도 모르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받았었다. 모두가 괘씸했다. 하지만 이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나에게 최종적으로 '이것은 고통이야'라고 말해준 사람도 나고, '이것은 행복이야'라고 말해준 사람도 나다. 나의 행복의 최종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 중이다.


무섭지만 천천히 하지만 뚝심있게 다시 씩씩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늘 되내이려고 한다. 내가 받았던 고통들을 기억하고, 그 고통들은 남들에게 절대 주지 말아야지. 늘 조심해야지 하고 말이다.


최상의 자존감을 갖는 것은 평생의 숙제이지만, 자존감을 되찾는 첫 번째 옵션은 나를 예뻐해주는 것, 나를 귀하게 생각해주는 것 인 것 같다. 부족한 점 투성인 나지만, 그래도 오늘도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잘 살아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 할게 내 자신아.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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