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 내려앉은 온기
새벽 5시, 아직은 까만 어둠이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나와 섰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꿈의 여운을 떨치려 스트레칭을 한다.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얼음장 같은 공기가 온몸을 구석구석 채운다. 겨울 냄새가 났다. ‘이제 정말 패딩을 꺼내야 하나...’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선천적인 건지 아닌지 기억도 나지 않는 때부터 나는 유달리 더위를 싫어했고 찬 공기를 좋아했다. 늦봄부터 내리쬐는 한낮의 온기는 누군가에게는 시작이었지만 내게는 곤혹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지는 겨울, 나의 한 해는 새로 시작한다.
출근길 지하철 역 앞에 못 보던 리어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60대 할머니 한분이 따끈한 어묵을 팔고 계셨다. ‘아싸 이제 아침마다 어묵을 먹을 수 있겠구나.’ 즐거웠다. 내게 겨울은 흑백 배경 속에 들어 있는 푸근한 길거리 음식들의 잔치다. 따끈한 어묵을 한 입 베어 물고 핸드폰으로 전철 시간을 확인한다. 5분 정도 여유가 있구나 생각하는 찰나에 포근한 목소리로 주인장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출근하시나 봐요. 날씨 추운데 국물 좀 마셔요.>
주인장이 건네는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내 안을 채우고 있던 한기가 한 움큼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도 아침부터 고생하시네요.>
여느 때였다면 핸드폰으로 시시콜콜한 기사나 검색하며 시간을 때웠을 테지만 오늘은 주인장의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간다. 마스크에 가려, 어묵 국물의 뿌연 김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푸근한 인상이다. 어찌 보면, 겨울철 길거리 음식은 그것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을 닮았다. 많고도 많은 길거리 음식 중에 계절과 함께 연상되는 것은 겨울 음식인 건 그 때문일까.
출근길에서 만났던 어묵을 파는 아주머니와의 기억이 떠나질 않았다. 종이컵에 담긴 주인장의 따뜻한 인사말이 굳이 두툼한 외투로 무장한 내 안에 온기를 슬쩍 심어 둔 것만 같다. 퇴근길에 집으로 곧장 가는 것 대신 군밤을 한 봉지 사러 간다. 요즘 보기 드물게 젊은 청년 하나가 가로등을 조명 삼아 군밤 껍질을 까고 있다. ‘나도 예전에 아르바이트 삼아 군고구마를 팔았었지..... 힘들게 살고 있구나.’ 개인의 사연을 무턱대고 단정 지어버린다.
<많이 팔려요? 추운데 고생 많네요.>
<아니에요. 용돈 벌이 정도는 충분합니다!>
씩씩한 미소로 돌아오는 답변이 무척 달가웠다. 홀어머니가 계신다느니 아픈 동생이 있다느니 아픈 사연들이 청년들을 거리로 내몬다는 소식에 가슴이 무거웠던 적이 많았다. 내 얄팍한 선입견이 그동안 많은 길거에 받지 않아도 될 연민과 애틋함을 입히고 있었구나. 하나하나 꼼꼼히 껍질을 깐 군밤을 한 봉지 사다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발걸음이 참 가볍다.
<여보야 군밤 먹자! 엄청 맛있어 보여서 샀어.>
<어머 웬일이래? 나 먹을 것까지 다 챙기고?>
<사랑하는 여보가 생각났지.>
무뚝뚝함은 경상도 남자들의 디폴드 값이라고 변명하며 못해봤던 싹싹함을 슬쩍 보여주니, 얼굴이 화끈거려 얼른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따라 흐르고 거울 속에 내 얼굴에서 옅지만 뚜렷한 미소가 흘러 들어왔음을 확인한다.
세상은 아직 따뜻하구나. 나는 여전히 행복하구나. 여름에는 감사하지 않았을 온기를 올 겨울 내내 온전하게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옷장에 패딩이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