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인 평가자에서 겸손한 기록원으로
새벽에 내린 눈이 학교 곳곳에 쌓였고 그 위에 작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고 앙증맞은 4개의 동그라미들이 저마다 다른 크기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밤 동안 아무도 없는 학교는 밤의 고양이들의 공긴이기도 했고, 그들의 밤은 하얀 눈 위에 기록으로 남았다. 담담한 발자국들이 누군가에게는 귀엽게 뒤뚱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가 총총거리는 모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름 돋는 울음소리를 내며 학교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길 고양이의 이야기가 된다. 그것들을 조합하는 누군가에 의해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쓰인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이맘때가 되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내 삶의 자취들을 이리저리 꺼내보게 된다. 어떤 것들은 한데 굳어져 추억의 범주에 쌓이고 또, 다른 것들은 평가의 대상이 되어 점수가 매겨진다. 잘된 일들의 공로는 주로 나 스스로에게 있으니 가산점, 아쉬웠던 말과 행동들에는 이런저런 핑계가 얹어져 부분 점수를 후하게 주다 보면, 이번 해도 썩 훌륭했구나 하는 평가가 안도감을 준다.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 나의 1년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남겨야 할 기록이라면?
12월 말 교사는 ‘학교 생활 기록부’를 쓰는 작가가 된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교사와 아이들은 평가자와 그 대상이 된다. 다른 작가의 손을 거쳤다면 전혀 달랐을 우리 반 아이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록이 되어 그들의 삶이라는 전기의 일부가 된다.
수업이 없는 1교시, 책상에 우리 반 아이 하나를 꺼내 올려놓았다. 허공에 흩어져 있는 아이와의 기억들을 붙잡아 뭉쳐보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제출했던 몇 장의 감상문들과 보고서를 뒤적거리며 대체 이 아이의 정체가 무엇이었는를 고민하고, 상담일지와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그간의 고민거리들과 아이의 성취를 점검한다. 봉사활동 시간으로 아이의 온도를 재고 독서 목록으로 아이의 크기를 짐작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하려 다짐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의 유무가 문장 곳곳에 스며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선호는 대개 아이가 내게 보여주었던 호감과 내 개인적 취향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또 한 번 객관적이지 못한 이야기가 생활기록부의 공백을 채워나가는 것을 멈춘다.
책상에 멍하니 앉아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다 행정실에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좀 뗄 수 있을까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아,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요.>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시간 나실 때 내려오셔서 가지고 가세요.>
바람도 쐴 겸해서 바깥 벤치에 앉아 나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읽어갔다.
졸업한 중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 진학 후 힘들었던 고등학교 1학년의 나는 ‘소심한 성격으로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가 되어 ‘수업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진로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비로소 교직이라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만 했던 3학년 때 나는 ‘본인의 목표에만 관심이 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하지만 ‘자신이 알게 된 지식을 다른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것을 즐기는’ 무언가 모순으로 가득 찬 1년을 보냈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내게 내린 평가로 가득 찬 글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 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다른 사람 이야기야.’
생활기록부를 덮고 문서 분쇄기에 한 장, 한 장 갈아 넣었다. 모처럼 예전의 나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함께 넣어 갈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가득 찼을 1년은,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기록이 아닌 소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한 아이의 1년을 다루는 것에 대해 마치 전기 작가라도 되는 양 글을 써댔던 것은 아닐까. 아이에 대해 기록하는 책임을 그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특권은 내게서 객관성을 앗아갔고, 무책임하게 두드려댄 키보드 자판들로 새겨진 단어들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생활기록부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겸손한 관찰자의 마음으로, 1년이라는 시간 속에 찍힌 아이들의 발자취들을 담담하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