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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Feb 14. 2022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2020)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누군가 내게 그늘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늘을 알아야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따금 그 말을 떠올리며 다정한 온기를 느낀다. 오래된 그늘과 각각의 형상들. "헤맬 줄 아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천천히 들여다보기 위해 길을 잃기로 한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너무 밝고 환해서 가장 어두운 미로를 찾아간다.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마음의 한 부분이 퍼즐 조각처럼 잘게 부서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사람이 된다. 마지막까지 퍼즐을 맞추는 어린아이가 된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이 여전히 어려워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마음"으로 유예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날들 사이에서 가끔은, 그 무엇도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영영 이해하지 못할 어떤 순간이 있었음을 실감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시집을 읽을 때는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될 한 사람의 그늘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안희연 시인이 보여주는 삶의 민낯이 좋다. 상실이 불가피할지라도, 다음으로 계속 가보는 건 어떻겠냐는 다정한 제안(양경언의 해설). 그 말처럼, 계절이 바뀌기 전에 읽은 가장 다정한 시집. 언어는 절반밖에 기능하지 못하더라도 굳어지는 형태가 단단하다. 마음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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