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아주 오래된 말.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EBS 다큐멘터리 K '교육격차' 1부를 본 후 매우 긴긴밤을 보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사실들을 확인사살해 준 다큐였다. 다큐에서는 매우 대조되는 집단들을 비교했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의 대학생들 또는 수험생들 VS 대치동 출신 대학생들 또는 수험생들이었다.
이 다큐를 보고 매우 불편해진 이유는 이 현실이 내 자녀들에게 직면한 문제이고 이미 아이들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유일한 학원은 피아노학원뿐이다. 이제 4학년이 되었으니 수학도 어려워지고, 친구들이 학원 다니느라 바쁜 모양이다.
큰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자기주도학습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보니 학원을 의존하는 아이가 되었다. 친구들이 다 선행학습을 이미 하고 와서 그런지 본인도 매우 불안해한다. 학원 보내달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수학학원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학원만 다니면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이 아이들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기는 힘든 시대가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공부의 강요보다는 학습 습관이나 흔히 말하는 자기주도학습훈련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듣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냥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 방과 후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이가 많다는 핑계로 사실 손 놓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결국 학원을 보내던가 아님 엄마표로 해 주던가의 선택인데, 둘 다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 그저 알아서 잘해주겠거니라는 막연한 기대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무심한 엄마라는 꼬리표가 달려왔다.
학습격차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 이후 4-5학년이 되니 확실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기에 집에서 온라인 수업만 하고 거의 밥 세끼 챙겨 먹이느라 지쳐있던 나는 첫째 아들의 학습은 아예 봐줄 상황이 되지 못했다. 4부 <현수는 행복할 수 있을까> 편을 보면 학교 운동장에서 테스트(?) 같은 것을 했다. 결국은 부모의 관리를 잘 받은 아이 VS 관리를 잘 받을 수 없었던 아이(코로나 시기에 혼자 지냈다 등등). 뒷걸음과 앞걸음으로 아이들의 출발선은 달라졌다.
생계형 맞벌이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장면이 상당히 불편하고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매우 안타까웠다. 출발선이 다른 우리나라 교육계의 현실이 착잡하다. 아이들이 그런 현실을 아는 것이 부모로서 슬프고, 미안하다. 그래도 엄마는 너희들이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감히 해주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