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부부 Nov 08. 2020

스댕의 배신

이유식 준비 작업, 스테인리스 연마제 닦기

아이에 관련된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하자 모든 게 더욱 예민해졌다. 남편이 먹는 거였으면 그냥 대충하고 넘어갔을 일들도 아이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신중하고 꼼꼼하고 예민해진다.

닦으려고 내놓은 스테인리스 그릇들

나의 예민한 촉을 처음으로 깨운 건 스테인리스 편수냄비다.


초기 이유식의 필수용품 중 하나가 편수냄비다. 채소나 고기도 데치고, 미음도 끓이고. 이런 편수냄비를 그냥 쓰자니 어딘가 모르게 찜찜했다.


신나게 구글링을 한 결과 편수냄비에 묻은 연마제를 꼭 제거해야 한다는 주부 9단 엄마들의 포스팅이 줄줄이 나왔다.


배테랑 엄마들 말로는 연마제는 기름에 녹기 때문에 반드시 기름(식용유)으로 닦아야 한다는 거였다. 기름으로 닦아낸 스테인리스 그릇은 식초와 베이킹소다로 다시 한번 샤워해야 한다. 그래야 이유식 만들기에 적합한 스테인리스로 거듭나게 됐다.


연마제. 솔직히 말해,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여태 살면서 스테인리스 연마제를 제거해본 적 없다. 세제로 박박 닦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엄마들의 충고를 발판 삼아 스테인리스를 식용유로 닦아보니 시커먼 연마제가 끊임없이 나왔다. 30년 이상 무지 뒤에 숨어있던 나의 무심함을 한탄하며 닦고 또 닦았다. 내가 연마제를 옳은 방법으로 제거하지 않은 조리도구를 쓰면서도 이렇게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선 아이 용품에 관련된 스테인리스 그릇을 다 닦기로 했다. 빠르게 내 레이더망에 들어온 것들은 아이 젖병 삶는 통, 아이 분유 물 저장해두는 보온병. 아이 이유식 중탕하는 냄비 등이었다. 모조리 꺼내놓고 보니 하루 안에 끝날 작업이 아니었다. 내가 스테인리스 그릇을 이렇게 좋아했던가, 평소에는 환경호르몬 탓에 거들떠도 보지 않던 플라스틱 용기가 어찌나 사랑스러워 보이던지.


연마제는 닦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기름을 하나하나 묻혀 구석까지 닦으려니 손가락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한 번에 휙 닦이는 게 아니라 닦고 또 닦아야 구석에 있는 연마제까지 제거됐다. 그렇게 닦고, 끓이고 하는 과정들이 2박 3일이 지나갔다. 시커먼 연마제의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환경호르몬으로부터 안전하고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튼튼할 것 같았던 우리 집 모든 스테인리스 그릇들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니 내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연마제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우리 아이에게 또 한 번 감사한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놈의 분유 1000m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