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는 짝을 찾지 못한 인간은 동물로 변한다는 동화적 세계관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일명 커플메이킹 호텔로 칭해지는 곳으로 끌려온다. 이 호텔에 끌려온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45일. 45일간의 유예기간 동안 짝을 찾아야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영화의 제1막은 데이비드가 끌려온 호텔에서 진행된다. 데이비드를 포함한 호텔 손님들은 모두 철저히 교정 당해야만 하는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호텔의 운영 시스템하에 손님들은 끊임없이 '한 묶음'이 될 것을 강요당한다. 호텔 직원들이 무대 위에 오른다. 그리곤 그들은 20세기 독재 정권의 대변인처럼 '한 묶음'의 가치를 찬양하고 신봉한다. 호텔의 규율을 어기는 손님들을 처벌하는 것 역시 호텔 직원들이다. 호텔 직원들은 혼자 욕망을 푼 손님의 손을 뜨거운 토스트기에 쑤셔 넣는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인 호텔에서 독재정권에서나 볼법한 강압적인 교정이 이루어진다.
데이비드의 절름발이 친구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인과 한 묶음이 되기 위해 자해를 한다. 한 묶음이 될 수 있는 전제조건인 표면적인 공통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절름발이 친구가 코피를 흘리며 여인에게 접근한다. 순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시그니처인 기괴한 효과음이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사이렌처럼 울려퍼진다.
시선이 이동한다. 규율사회라는 울타리의 폭력성을 비추던 카메라가 울타리 속 개인을 줌인한다. 규율사회의 폭력성이 개인의 폭력성으로 전가된다. 모든 것이 이상하고 기괴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가장 특이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규율사회를 다룬 기존의 작품들은 규율사회 갖는, 다시 말해 울타리가 갖는 문제점을 끊임없이 비추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계속해서 시선을 돌린다.
영화의 1막이 호텔에서 진행되었다면 2막의 배경은 숲속이다. 동물로 변할 위기에 처한 데이비드는 호텔에서 탈출한다. 호텔 측의 추적을 피해 근처 숲속으로 숨어든 데이비드는 숲속에서 생활하는 무리와 조우한다. 데이비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이들은 호텔과 정반대되는 즉, 주류에 반하는 가치관을 추구한다. 이곳에서 '한 묶음'은 죄악이다. 철저히 '하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마치 메신저로 채팅을 하는 것마냥 멀찌감치 나누는 '대화'가 이들에게 허용된 소통의 전부이다.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았던 데이비드의 눈에 콘택트렌즈를 끼는 한 여인이 들어온다.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 한 묶음이 되어야만 하는 공간에서 짝을 찾지 못하고, 하나여야만 하는 공간에서 짝을 만난다.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는 근시 여인과 숲속 무리에서 도망쳐 도심으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이들의 계획을 눈치챈 무리의 우두머리는 근시 여인의 눈을 멀게 만든다. 비정상을 향한 폭력은 어디서든 마찬가지다. '근시'라는 둘 사이에 공통점을 지워냄으로써 이들은 도심에도, 숲속에도 속할 수 없는 완벽한 소수자가 돼버린다.
영화의 최종장은 도심의 음식점에서 펼쳐진다. 지워진 공통점을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 데이비드는 음식용 나이프를 들고 거울 앞에 섰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에 칼끝을 맞댄다. 그리고 화장실 밖, 근시여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데이비드를 기다린다. 우리의 시야엔 오롯이 비극을 맞은 불쌍한 개인만이 들어온다. ‘데이비드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인간일까.’ 지나치게 부수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정상, 비정상의 구분 짓기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는 규율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워진 곳엔 개인의 선택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선택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