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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roo Aug 05. 2020

왜 조는 로리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영화] 작은 아씨들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보물들


차가운 마음으로 영화를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영화들은 낮은 온도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나에겐 ‘작은 아씨들’이 그런 영화였다. 어릴 적 나는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조가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를 읽으며 자랐던 어린 나는 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2019년의 작은 아씨들은 달랐다. 관객 대부분이 조를 이해하고 응원하고 또 안타까워했다. 1868년에 쓰여진 소설의 주인공이 152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존중받게 되었다.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처럼 ‘의식의 깨어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긴 세월 동안 난파선에 숨겨져 있던 보물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작은 아씨들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152년 동안 동일했다. 달라진 건 그 이야기를 존중해주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감독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이 탁월하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그녀가 원작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대신 원작이 하고자 했던 진짜 이야기를 영화의 전면부에 내세우는 연출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연출 덕에 관객들은 더욱더 명확한 시선으로 이야기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19세기를 살아간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은 여성이 어떻게 '자신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방향성을 보여준다. 작은 아씨들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끊임없이 서로 부대끼며 함께 성장해나간다. 작은 아씨들이 살아갔던 19세기는 말 그대로 태동의 시대였다. 고리타분한 옛 가치가 전복되고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켜져 갔다. 그러나 여성들은 변화의 소용돌이 귀퉁이에서 언제나처럼 불완전한 존재로 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낮은 온도로 영화를 들여다볼 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전과 같이 조와 로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로만 바라봤다면, 이 영화는 그저 고증이 잘된 고전 로맨스 영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뜨겁게 표면적인 것들만을 바라보았던 그때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2019년 관객들의 눈에 비친 작은 아씨들은 결혼을 꿈꾸는 어린 소녀들이 아닌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다움’을 놓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이었다. 배우를 꿈꾸는 첫째 메그, 작가를 꿈꾸는 둘째 조,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셋째 베스 그리고 화가를 꿈꾸는 막내 에이미까지. 관객들은 완전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녀들의 끝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조는 19세기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도전적인 선택지를 제시했다. 조는 19세기 당시 여성의 자아실현을 거세시키는 가장 큰 유혹인 결혼을 거부했다. 19세기 여성의 유일한 진짜 직업은 결혼 생활이었다. 그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다시 말해 남성이 없는 여성은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조의 고모가 계속해서 자매들에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의 고모는 일찌감치 남편을 떠나보낸 여성 상속인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아왔을 것이다.그런 불합리함이 살아숨쉬는 시대였다. 그녀는 네자매가 자기와 같은 불완전한 삶을 살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조는 왜 로리의 청혼을 거절했을까?


아주 오래된 질문을 꺼낼 차례다. '조는 왜 로리의 청혼을 거절했을까?' 우린 조가 19세기를 살아간 여성임을 잊어선 안 된다. 19세기 여성의 결혼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감을 뜻했다. 조는 로리에게 지금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조는 '나'로서 계속 살아가고 싶어 했다. 로리가 조에게 청혼할 당시 조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작가로서 조그마한 성공조차 거두지 못했던 조에게 결혼은 '자신다움'을 축소하는 가부장적 선택지에 불과했다. 만일 로리가 나중에, 그러니까 조가 꿈을 이루어 경제적인 독립을 획득하고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시점에, 청혼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결혼을 선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의 말대로 로리와 결혼한 조는 로리의 아내로서 온당히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가부장적 결혼’의 잔재는 여전히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오직 결혼만이 여성의 삶에 궁극적인 목표였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기에 조의 선택이 결코 사랑을 모르는 미성숙한 소녀의 실수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조에게 있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거절'이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투쟁'이었다. 누군가에겐 앞선 투쟁이란 표현이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가 자신의 엄마 로라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선택이 분명 변화를 위한 투쟁의 연장선에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조는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 '사랑만이 모든 여자를 위한 거라는 말들이 지겨워 죽겠어요.'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조 역시 외로웠던 것이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며 조 역시 힘들고 외롭고 불안했던 것이다.  흔들리는 조에게 로라는 '어떤 천성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라는 말을 해준다. 로라의 말대로 조는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인물이었다. 꺾일 수 없는 고결함과 존엄성 그리고 자부심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국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었다.


더불어 조가 마지막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이 지향하는 바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녀의 선택이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끝없는 투쟁의 시작점이었음이 말이다. 2019년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빛나는 지점들은 바로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가 팽팽하게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그는 왜 결혼했을까?


 조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로리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렇다면 메그는 왜 결혼을 했을까? 얼핏 보면 메그는 조와 대척점에 있는 현실에 순응하는 여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네 꿈과 내 꿈이 다르다고 해서 내 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라는 메그의 대사를 통해 매그 역시 조와 다를 것 없는 선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메그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보다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메그에게는 더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메그는 가난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또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자신이 꿈꾸던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살아간다. 조에게 결혼은 '자신다움'을 갉아먹는 선택지였지만 메그에게 '결혼'은 자신이 꿈꾸던 가정을 실현하는 선택지였던 것이다. 메그역을 맡은 배우 엠마 왓슨은 네 자매의 선택 모두가 페미니즘이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다른 듯 보이는 네 자매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꺾이지 않는 천성을 각자의 방식대로 지켜냈다.

 


작은 아씨들의 '로리'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의 '대현'


 작은 아씨들이 현대적이라고 평가받는 지점이 오직 여성캐릭터들의 주체성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작은 아씨들의 남성캐릭터에 주목해보자. 미스터 로리와 로리는 마치가의 네 자매들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네 자매의 아버지는 딸들의 교육에 관심이 있고 딸들을 존중하는 자애로운 인물이다. 이들은 19세기의 남성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탈 가부장적인 인물들이다.


그녀는 왜 소설 속 남성들을 이토록 이상적으로 묘사하였을까? 작가는 작은 아씨들 속 남성캐릭터로 하여금 여성의 불평등을 마주하는 남성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남편 '대현' 역시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여성들의 삶을 바꾸어주는 백마탄 왕자님이 아닌 그저 옆에서 그들을 꾸준히 응원하고 또 이해해주는 존재로 묘사된다.


영화 '차이나 타운'과 '걸캅스' 등이 남녀 캐릭터의 역할 전복을 통해 '고정된 성 이미지'를 첨예하게 보여줬다면 '작은 아씨들'과 '82년생 김지영'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다. 결은 다르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결국 우린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무한히 이어져갈 이야기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는 현재를 넘어 저 멀리까지 무한히 이어져 있다. '의식이 깨어나는 시대'를 살아간다는 특권은 수많은 작은 아씨들의 발걸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의 외로운 발걸음 위에 살아가고 있음을 되새기며. 조가 학교를 세운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또 끝없이 깨어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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