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나 글, 그림 《연이와 버들도령》
백희나 작가님의 신간이 나왔다. 무려 3년 만이다.《나는 개다》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신간이다. 재작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수상하기도 하셨고 워낙 유명한 책들이 많으니 "백희나 그림책" 하면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듯하다. 백희나 작가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당연히《구름빵》이다. 《구름빵》이후로는 한동안 백희나 작가님 책들을 많이 찾아보진 않았다. 아들이 작가님의 몇몇 책을 좋아해 집에 두세 권 정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백희나 작가님의 캐릭터들이 모습도 표정도 뭔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어 굳이 찾아보진 않았었다.《구름빵》에서 눈 크기가 다른 홍비, 《이상한 엄마》의 연지곤지 찍은 선녀님, 《장수탕 선녀님》속 화장 곱게 한 할머니까지 다들 캐릭터가 괴기스러웠다. 지금은 캐릭터들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장되어 있지만 그런 모습들이 실제 우리와 묘하게 닮아 있어 이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이번 신작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의 캐릭터들은 어떠할까?
이번 책은《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에서 처럼 닥종이 인형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장수탕 선녀님》에서 선보였던 실사 배경 등 이전 책에서 사용된 여러 기법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작가님이 그간 쌓아 온 내공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인스타 라이브 방송에서 제작 과정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회자의 질문에 아이 같이 웃으며 "이르케 이르케"하며 손짓으로 설명해주셨지만 말씀만큼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보면서 역시 주인공 연이에게 눈이 제일 많이 갔다. 연이가 눈밭을 헤매다 발견한 동굴 속 돌문 앞에서 연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지쳐있으면서도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린 연이의 표정을 보면서 한참을 연이와 같은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작가가 인형을 손으로 만져 표정을 만들었다기보다 진짜 배우가 연기하는 듯 실감이 났다.
그리고 그다음 페이지! 돌문 저 너머의 세상은 실사 사진으로 표현된 눈 오는 배경과 대비되어 한국 전통 문양들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은 꽃이 만발한 봄이다. 연이의 현실 공간과 꿈의 공간을 실사와 그림, 겨울과 봄으로 표현한 환상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그림책의 묘미란 이런 것이지!' 했다. 버들 도령이 정면 풀샷으로 등장하는 장면과 연이가 버들 도령 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장면의 구도는 말할 것도 없다. 시청률 십몇 퍼센트를 찍는 사극 못지않은 연출이었다.
연이에겐 그동안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
그래서 이런 기막힌 일이 닥쳤어도 그래, 그러려니 싶은 거야.
연이에게 다시 돌아와 연이는 어떤 소녀일까? 작가님은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연이를 만들기 위해 몇 번을 고쳐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이는 그저 나이 든 여인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르는 소녀이다. 소녀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미소 한 번 짓지를 않는다. 버들 도령의 죽음 앞에서도 그러려니 싶은 덤덤함이 그간의 연이의 삶을 말해주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다. 슬픔의 눈물은 꾹 참고 버들 도령이 되살아났을 때 비로소 울음을 터트린 연이.
이 책과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최근 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이 떠올랐다. 드라마 속 덕임이는 무척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이전 사극에서 대체로 그려지는 궁 안 여자들은 왕의 승은을 얻으려 암투를 벌이거나 신분과 성별 때문에 주인공이 아니라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자기 자신과 일을 사랑하는 덕임이도 사랑을 대가로 죽음을 택한 덕임의 친구도 궁녀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암살단을 조직한 제조 상궁도 결과야 어떻든 모두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 연이도 나이 든 여인을 떠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죽은 버들 도령의 뼈를 하나하나 모으고 자신이 유일하게 소유한 소중한 걸 놓아준다. 어쩌면 버들 도령이 다시 살아난 것은 나이 든 여인의 수하에 있던 연이가 아니라 이제 새롭게 태어날 연이의 모습을 버들 도령에게 투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곳에서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글을 쓴 작가님도 확신하지 못한 연이의 무지개 너머의 미래. 나는 연이가 자신의 삶을 살기를 응원한다. 덕임이는 자신이 처한 환경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덕임이처럼 연이도 사소한 선택도 자신의 의지였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잘 살았어"라는 결말을 위해 그 과정이 이제 연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