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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Dec 23. 2023

과연, 그럴 만하구나

승자가 될 노력을 하고 있는 이들이 언젠가는 듣게 될 말!  

과연

 -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주로 생각과 실제가 같음을 확인할 때에 쓴다.

 - 결과에 있어서도 참으로


'과연'이란 말은 인과응보나 자업자득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어떠한 일이 그에 합당한 결과로 귀결 지어지는 순간, 우리는 '과연'이라는 말을 한다. 올림픽 경기를 볼 때도 그랬다. 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경기에는 '과연' 그럴 만한 실력과 자질이 있었고, 그들의 피나는 노력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수 있었다.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거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을 때, 우리의 입에선 감탄과 함께 이런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과연!'


그런데 가끔 '과연'이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나도 저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아니면 저 사람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 보이는데? 하는 의혹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이다. 하지만 진정한 승자나 정말로 탁월한 자 앞에선 '과연'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어떠한 기준에 의해 승자와 패자 혹은 우수한 자와 부족한 자가 구분되었든지 간에 받아들임의 미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나의 모자람을 조금이라도 채울 여지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연'이란 말에 도달하게 될 때까지 해야 하는 건, 오로지 지난한 노력뿐이다.


승자를 향한 찬사의 말!

과연, 그럴 만하구나.



나는 살면서 2등을 많이 했다. 1등을 한 기억도 있지만 2등에 머무른 적이 더 많았다. 2등 콤플렉스는 사는 내내 지속되었다. 두 번의 공무원 시험 결과가 평행이론처럼 똑같았다. 교사 임용시험과 공무원 시험에서 똑같이 2등으로 합격했는데 두 번 다 내 앞에는 남자가 있었다. 물론 이런 류의 시험은 합격만 하면 그만이기에 등수가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늘 2등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불안은 강한 징크스가 되어 내 안에 각인되었다.   


실제로 2등에게 돌아가는 영광은 크지 않다. 1등을 한 사람, 혹은 당선된 사람에게만 세상은 미소 지어 준다. 2등을 한 사람이나 안타깝게 탈락한 사람은 축하받기보다 오히려 동정을 받을 때도 있다. 마치 로또 2등에 당첨된 사람처럼!  '아휴, 아까워서 어쩌나.'  그래도 2등은 1등 못지않은 실력이 있으며 곧 1등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노력해 온 사람일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과연'이란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 세월 스스로를 '과연'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자위하며 살았다.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패배감'을 맛보게 되었다. '색다르다'는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공부밖에는 내 인생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 다행히도 학업과 직업의 세계는 그동안 나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의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고 두 군데의 대기업에 입사했으며 자격증 시험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만 골라하면서 안전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한 교만과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시작한 순간,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얼토당토않을 정도로 앞이 막막하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공부처럼 해야 할 것이 있고 정답이 있고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조차 가늠이 안 됐다. 한글도 못 뗀 어린애가 중학교에 입학한 기분이었고 하루아침에 엄청난 열등생으로 전락한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나의 처지는 서당개도 아닌 주제에 풍월을 읊겠다고 덤비는 동네 똥개 같다고나 할까? 그럼 이 똥개가 서당개가 되어 풍월이라도 읊으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 되는 것일까? 참담한 것은 그것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뭘 알아야 메타인지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낯선 절망감에 허덕이던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늘 잘할 수 있는 일들을 1등도 아닌 2등으로 적당히 해내면서 '과연, 그럴 만하구나' 혹은 '과연,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을 마약처럼 받아먹으며 살아왔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가 못났고 모자라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누군가로부터 그런 평가를 듣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스스로 똥개의 자리로 기어들어가 여기저기 킁킁거리고 다니고 있다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신은 내게 열렬한 패배감을 선물로 주려나 보다. 살면서 평생 맛보지 못하고 지나갔을 진한 패배의 잔들을 줄줄이 따라 주면서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취하게 만들려나 보다. 그래서 '과연'이란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닿기 어려운 일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하려는가 보다. 신은 자만에 빠졌던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고쳐 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과대망상적인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에서 오랫동안 부여잡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자만과 오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 능력이 미치는 안전한 길만 골라서 잘난 척하며 걸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학생의 절망감을 이제야 온전히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지금껏 내가 해온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알겠다. 글쓰기가 교만한 나를 반성하게 한 것이다.


'과연, 그럴 만하구나.' 누구나 듣고 싶은 말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 숨은 땀방울, 눈물방울의 양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리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와 잘할 수 없는 일을 할 때의 결과도 천차만별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정답은 없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건너오던 징검다리에서 한 발이 푹 빠져 몸의 절반이 젖어버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강을 다 건너고 나면 티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가볍게 건넌 사람이든 피눈물 범벅이 되어 온몸이 젖어버린 사람이든 '과연, 그럴 만하구나.'라는 찬사를 받는 것은 매한가지일 테니까.


그런데 솔직히 나는 후자가 될 것만 같아 두렵다. 글쓰기의 세계는 적어도 내겐 진흙탕에서 미친 듯이 뒹굴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과연'일 테니까. 이미 모든 난관을 건너 자신이 꿈꾸던 무언가의 '과연'에 이른 이들에게 시기심 없는 순한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아직 승자가 아니지만, 언젠가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 말을 부적처럼 건네주고 싶다.


과연, 그럴 만하구나.


출처  Pixabay

#과연

#부사

#공감에세이

#승자가 되기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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