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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Dec 20. 2023

결코, 너를 보낼 수는 없어

자식을 잃는, 참척의 슬픔은 결코...

결코

 -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결코'는 주로 부정문에 쓰인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부정을 표현할 때 쓴다. '하늘이 쪽이 나도,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결코 할 수 없다는 의지 혹은 절대로 아니라는 부정! 하지만 세상에 결코 할 수 없거나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결코'라는 부사를 가슴에 품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마땅한 답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읽은 나희덕의 '허공 한 줌'이란 시가 떠올랐다. [ 어느 날 우리 앞에 죽음이 방문했다 (brunch.co.kr) ] 자식을 잃을까 봐 두려웠던 엄마는 죽어서도 정말로 죽지 못했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죽음을 죽을 수 있었다. 그 시를 읽으며 나는 아들의 추락 사고를 떠올렸고 한동안 가슴이 서늘했었.  허공 한 줌이라도 움켜쥐려는 절박함, 죽어서도 놓아줄 수 없는 절절함!  아, 자식에게만은 '결코'가 성립할  있겠구나 싶었.


결코, 너를 보낼 수는 없어.




살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일들 중,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이다. 특히  대상이 자식이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잃는다는 말은 입에 담기조차 어렵기에 '참척을 당하다'라는 말로 돌려 표현하기도 한다. 차마 말로 하기 불경스러운 일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끔찍한 일이다.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본인이 겪은 참척의 고통을  처절하게 고백했는데 그 고통의 크기는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 땀 한 땀 피눈물로 기워 놓은 글을 읽으며 나도 함께 통곡하는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무섭고도 무거운 '결코'라는 말을 우리는 살면서 너무 쉽게 사용하곤 한다.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품고 심판자가 되어 이 말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다. 자식에게, 부부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심지어 신에게 우리는 종종 '결코' 안 된다거나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정말로 아닌 것일까?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고 하는 일들이 진짜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돌이켜 보면 내가 아무리 거부하고 도망쳐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내가 지닌 세상에 대한 정의는 맞을 때보다 틀릴 때가 더 많았다. 운명은 언제나 배반이란 칼날을 몸 뒤에 숨기고  태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 나의 '결코'는 결국 부서져버릴 때가 더 많았다.


살면서 엄마에게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 못했다.  그 아이에 대해서. 희뿌연한 안개에 뒤덮여 점차  형체마저 흐릿해져 가는  아이. 진짜로 세상에 존재하기는 했었는이따금  의심스러워지는 아이. 오로지  옅은 기억에만 의존해 살아있었음을 확인받을 수 있는 아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영원히 사라진 아이. 동생. 소정.


어볼 수 없었다.  그 아이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죄스러웠다. 이유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엄마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 내 곁에 누워 있던 그 애의 여린 숨결과 작은 온기를. 엄마는 동생에 대해선 거의 말이 없었다. 그래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몇 가지 이야기들에  머릿속에 남아 있던 파편적인 기억들을 짜깁기해 나는  개의 장면들을 꽤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사진처럼 각인된 장면들을 가슴에 품고 이따금 꺼내보면서 살았다.


나는 죽은 동생에 대한 옅은 그리움과 동정심, 약간의 부채감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엄마의 상실에 대해선 그다지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불현듯 깨달았다. 동생의 죽음이 지닌 그토록 잔인한 의미를...  죽은 자식의 눈을 손으로 쓸어 감기고, 뒷산에  직접 파묻어야 했던 젊은 엄마의 상처와 고통, 절망과 한을 나는 아주 뒤늦게서이해하게 된 것이다.


임신 초기 하혈을 했을 때, 임신 중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어린 아들이 옥상에서 추락했을 때 온몸의 피가 바짝 말라붙어 버릴 것만 같던 두려움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결코 너를 보낼 수는 없다.'며 온몸으로 운명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던 절규를 잊지 못한다. 그런데 엄마는 뱃속의 아이를, 막 낳은 아이를, 키우던 아이까지 모두 잃었었다. 엄마의 심장에는 참척의 화살이 일말의 자비도 없이 여러 차례 박혔던 것이다. 나는 기적처럼 어쩌면 저주처럼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었다.


'결코'라는 부사를 들여다보면 그 처절한 고통들되살아난다.  '결코 너를 보낼 수 없다.' 절박한 외침이 귓가를 울리가슴옥죈다. 허공을 향한 간절한 움켜쥠이 보이는 것만 같다. '결코'는 우리가 삶에서 결코 부딪히기 싫은 고통들을 상기시킨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운명이  잔인한 얼굴로 우리 앞에 들이닥쳤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를 부르짖는 말고는 속수무책이지 않았던가?


나는 '결코' 앞에 허망하게 무릎 꿇지 않겠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똑같은 말을 무수히 반복하게 될지라도... 나는.


결코, 너를 보낼 수는 없어.


청주 수암골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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