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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14. 2023

"엄마, 죽고 싶어."라는 말의 무게

아무리 무거워도 알고 싶다. 너의 고통을

어제 아침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대구 학폭 중학생 아들이 유서에 3번이나 쓴 부탁'이라는 제목으로 된 기사였다.


중학교 2학년 권승민 군은 유서 4장을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시체검안소에서 막내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는 아들의 맨몸을 보자 그만 오열하고 말았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시퍼런 멍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무려 9개월 동안 승민 군의 온몸에 폭력의 상처를 남긴 이들은 끔찍하게도 같은 학교 학생들이었다. 중학생이 한 짓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승민 군을 구타하고 괴롭혔다. 그것도 다른 장소가 아닌 승민 군의 집 안에서. 승민 군은 그들이 자신을 가해할 때 사용한 폭행 도구와 폭력의 흔적들을 식구들이 오기 전에 스스로 치워야만 했다. 이 비참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 죽음을 결심한 승민 군이 유서에 세 번이나 부탁한 것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것이었다. 자기를 가해한 학생들이 집으로 들어와 가족들까지 괴롭힐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승민 군은 자신의 선택이 불효임을 사죄면서 제발 자기로 인해 가족들이 불행해지지 않기를 당부하며 아까운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말았다.


기사를 읽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참 동안을 가슴이 메이고 아파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아이를 생각하면 자꾸만 눈앞이 흐려진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2011년도에 일어난 일로 이미 십여 년이 흐른 것을 TV 프로그램에서 재조명하면서 기사화된 것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건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우리는 믿을 것이다. 그만큼 학교폭력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어쩌면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가고 있지 않은가!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드라마 속의 지옥 같은 모습들이 실제 우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더 글로리


밤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역시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기사를 대할 때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남편 역시 나 못지않게 속상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이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동안 어찌하여 부모가 몰랐을까에 생각이 미쳤고 마치 우리가 그 아이의 부모라도 된 것처럼 안타깝고 죄스러웠다. 특히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평소 중학생이 된 아들의 맨몸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몰랐다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오열은 단순히 피눈물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아픔 그 이상일 것이기에.


문득 오래전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아들이 네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밤이면 잠을 잘 못 자고 울기만 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아이를 매일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어린이집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방학이 되면 선생님들이 교대로 여름휴가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선생님 수가 평소보다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니 방학  때 나온 아이들은 우르르한데 모아 대충 시간 때우기식의 돌봄을 해주었다. 아이가 그런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었지만 2주나 되는 방학을 워킹맘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잠을 자지 못하고 울던 아이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

 "엄마, 죽고 싶어."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네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말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울기만 할 뿐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는 암만 물어봐도 말이 없었다.


나는 깊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지고 '소아 우울증'에 대해 검색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마음이 힘들 수 있고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다음 날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어린이집으로부터는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저 잘 지낸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방학이다 보니 아이들을 모아두고 TV만 틀어주는 것 같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정해진 시간만 잠시 보여줄 뿐이라며 명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답답하고 환장하겠는 건 엄마인 나일 뿐이었다. 급히 수소문하여 상담 센터를 예약하고 지인에게 물어 지역의 상담사와도 면담을 했다. 너무 어린아이이기 때문일까?  엄마가 느끼는 절박함과 달리 외부인들의 반응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좀 더 지켜보라는 답변만 얻었을 뿐이다.


끔찍했던 방학 기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그 일은 서서히 묻혔고 아이도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싫은 감정을 어린 아이라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려니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말은 늘 가슴에 얹혀 해결하지 못한 짐으로 남은 채 틈만 나면 나를 괴롭혔다. 오래 곪은 상처는 터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다섯 살 때 아들은 결국 그 어린이집을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무려 한 달 가까이 어린이집 가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억지로 보내기에는 아이가 너무 커버렸기에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었다. 나는 졸지에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는 민폐맘이 되어 위기의 직장생활을 해야만 했다. 학교에 가서 비어 있는 실에 아이를 혼자 넣어 두고 나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아이를 보살피는 눈물겨운 나날들을 보냈다.


결국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다니던 어린이집을 포기하기로 했다. 연도 중에 느닷없이 옮겨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아는 분이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소개해 주었고 나는 당장 달려가 원장 수녀님께 빌듯이 사정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면서 바로 다음날부터 유치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3년을 다닌 어린이집을 떠나는데도 아이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당 유치원에 처음 방문하던 날, 나를 보고 말했다.

"엄마, 나는 이제 여기를 다닐게. 엄마는 성당을 다니면 되겠네."

그러더니 정말 아이는 자기가 한 말 그대로 바로 다음날부터 성당 유치원에 입학하여 행복하게 다녔고 졸업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다.


이렇게 되고 보니 1년 전 일이 새삼 후회가 되었다. 왜 그때 나는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까? 당시엔 뚜렷한 사건도 없이 어린이집을 그만둔다는 게 왠지 부담스러웠다. 어린이집 때문이 아니라 아이 자신의 문제라면 어딜 가도 달라지지 않을 건데 괜스레 환경을 바꿔 부작용만 겪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실은 몇 년을 거쳐 간신히 적응해 온 환경을 갑자기 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워킹맘인 나에게는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나는 아이의 고통을 보기보다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두려워했 것은 아닐까? 아이가 행복하게 유치원에 다니는 것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내 가슴엔 여전히 죄의식이 남아 있다.

출처  Pixabay


네 살짜리 아이가 철 모르고 한 죽고 싶다는 말에도 엄마인 나의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꺼졌다. 만약 중학생이 된 아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 본다. 중학생이라면 인생을 알지는 못할 나이이지만 적어도 죽고 살고에 대한 개념은 있을 나이이다. 죽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전혀 모를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힘들고 아프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만약 아들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 마음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니 '죽고 싶다'는 말을 해주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 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말 한마디만 해주어도 아이를 돕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해볼  게 아닌가? 겨우 네 살이었던 아들도 내가 상담을 고 아이를 센터에 데리고 다니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면서  눈치채는 듯했었다. 엄마가 자기를 걱정해서 뭐라도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자기가 얼마나 엄마에게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 아픔을 나눴고 나는 아들을 지키고 도와주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물론 호들갑스럽게 어린이집의 잘못으로 몰아세우고 당장 때려치우고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건 나란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후회해도 실은 달라지기 어렵다. 그래도 그때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던 건 나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아들은 이제 내가 학교생활에 대해 물으면 늘 좋다고만 한다. 힘든 일도 없고 싫은 사람도 없단다. 여자아이들 엄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 전해 듣는다는데 아들은 갈수록 다 두루뭉술하게만 답한다. 그리고 좋다고 하니 좋으려니 하게 된다. 괜스레 기사를 보고 불안해진 나는 아홉 살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게 무어든 힘들고 고통스러운 건 꼭 엄마한테 말해 줘." "엄마를 제발 믿어 줘."

자못 진지하게 말하는 내게 아들은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언젠가 이 글을 읽을 아들아!

살다 보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나약한 것도 아니야.

엄마, 아빠에게 죄짓는 것은 더더욱 아니야.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은 이 세상에 없단다.

죽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날이 오면 제발 말 한마디만 해 주렴.

어린 날의 너처럼 말이야.

순간적인 실수로  용기를 내서 부디  한마디만 해 주렴.

그게 너와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모두 함께 살리는 일이란다.

우리 함께 살자!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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