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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야 Jun 21. 2023

우울증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얌전히 잘 다니던 대기업을 관두고,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 같은 곳에 스카우트가 되었다.

장차 유니콘 기업으로 키우며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던 나의 기대와 달리, 현실은 철저한 을 대접의 연속이었다.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갑 님- 클라이언트 님의 전화를 놓치지 않으려 스마트 워치를 사고,납품한 결과물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반복하고, 컴플레인 전화가 오면 실제로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읍소를 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바쁜 일정을 매일 소화하며 2년을 지내니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좀비 드라마 킹덤에서 밤이 되면 좀비들이 사라지듯이, 클라이언트 갑님들 회사의 저녁 일과가 끝나는 일곱시가 지나서야 독촉/갑질 전화가 사그라 들었고 그제야 나는 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에 가면 보상심리에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TV를 보고,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날이 밝으면 무섭게 다가올 좀비들의 습격이 두려워서인지, 아침마다 속이 쓰렸고, 밥은 넘어가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물 한 모금 보다 담배부터 피워댔다. 그렇게 몸은 망가져 갔고,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보니,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했던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대부분 아침을 두려워했다더라. 그때까지 나는 몰랐다. 이게 우울증의 또 다른 증상이었는지. 밤이 두려운것보다 아침이 두렵다는게 얼마나 더 끔찍한건지, 몰랐다.


 누구를 만나도 즐겁지가 않았고,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열 보따리가 있어,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 보따리로 채워지고, 편두통이 생기고 속은 역했다. 담배와 커피의 양은 늘어만 갔고 구부정한 자세 덕에 경추 척추 디스크가 와버려, 눈이 땡땡 아프기도 했다.

 아침이면 얻어맞으러 링으로 나가는 선수처럼 아침부터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나가는 내 눈에 들어온 거실 TV 속 평범한 일상들이 너무 부러웠다. 화면 너머 저 세상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으며, 길에서 마주치는 웃음 띤 사람들, 커피숍 안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내가 있는 지옥 저편 너무 행복한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출근을 하던 길에, 전화가 연달아 2통이 왔다. 1통은 독촉 전화, 1통은 수정 의뢰."네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가던 중에, 과호흡 현상이 일어났다. 숨이 안쉬어졌다. 이게 공황인가? 급히 강변북로 옆 한강 공원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아랫배가 쓰리고 숨은 안쉬어졌으며 높아진 안압과 두통으로 머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차라리 차사고가 나길 바라는구나.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딜까. 그렇게 한달을 환자처럼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가끔 겪는 과호흡과 이틀에 한번 꼴로 사먹는 안정액과 함께.  


 어느 날, 이제 여든을 바라보시는 부모님 집에서 하루를 묵는데, 어머니께서 라디오를 틀어 놓으신 채 도라지를 쪼개고 계셨다. 너무나 평화로운 내 유년시절의 아침 풍경. 정오가 되면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를 들으시겠지, 저녁이 되면 여섯시 내 고향 시그널 음악을 BGM삼아 밥상에 수저 놓는 소리가 들리겠지.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의 여행.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틈만 나면 라디오를 틀기 시작했다. 주의깊게 청취하는것이 아닌 생활 소음처럼 켜놓는 것이었는데, 처음엔 라디오에서 무슨 멘트가 나오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 집에서 라디오 소리가 나오던 그때의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 켜놓은 것 뿐. 그러다 어느 순간 부터 진행자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연소개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노래를 듣게 되었다.

 나보다도 힘든 사람들이 많았고, 저마다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안에는 '어쨌든 계속 되고 있는 일상'이 있었다.

 일상이 무너지지 않으면, 사람은 산다고 했다. 라디오 속의 사연들과 DJ의 멘트에 나는 내일도 DJ들과 만나기로 했고, 내가 서 있는 이쪽켠의 세상이 무너진다해도 저쪽 라디오 쪽의 세상은 계속해서 볕이 들어오는 세상 같았다. 그 볕을 남겨두고 싶어 여전히 켜놓고 지내는 습관이 들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김어준을 듣고, 91.9로 옮겨 정지영을 듣다가 정오의 희망곡-두시의 데이트와 컬투쇼를 번갈아, 이지혜의 오후의 발견, 그리고 배철수 . 좀 쉬다가 12시에는 93.9 서인의 심야다방 까지. 가끔 여섯시에 일어나 굿모닝 팝스를 들으면, 세상에 아침부터 이렇게 영어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고. 교통방송을 들으면 아이고 이 시간에 강변북로에서 사고나 났구나 싶기도 하고, 여튼 그 안에는 일상이 있었다.  

 
 낮에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저녁에는 초대손님 아이돌들의 밝음이, 심야에는 나보다 더 우울한 사람들의 고민이 있었다. 거의 나의 18시간을 옆에서 재잘거려주는 마냥 신난 사람들. 마냥 아무일도 없는 밝음.

 라디오 속의 세계는 언제나 평안하고, 아픈 사람들도 많지만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같은 환자의 정신건강에 좋다. 게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들도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나는 라디오 덕에 많은 우울증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우울증을 이겨내는 팁은, 예능 프로를 보다가 박수홍이 했던 이야기를 듣고 실천했던 것인데, 박수홍이 개인적으로 안좋은 일이 많고 슬럼프에 빠졌을때 (온갖 소송에 휘말리고 구설수가 있었을때) 유재석이 전화를 해서 딱 한마디 했다고 한다. '형, 나가서 운동해' 라고.

  

 나는 운동을 한적도 없고, 규칙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답답한 마음을 길에 버리고 오자는 마음으로 길가로 나갔다.

 골목을 지나 시장을 돌고 노인정을 돌아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왔다.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것과 의도하고 걷는 것의 운동량과 효과는 천지차이라고 했다. 일하면서도 많이 걸었는데 일부러 의식적으로 걸은것은 얼마 안됐기에, 처음에는 그 걷는 일이 낯설었고 아무 의미 없는 행동 같았다.
 휴대폰을 놓고 그냥 나가서 걷고 들어오길 일주일, (믿기 어렵겠지만) 어딘가에 나의 무게를 버리고 오는 듯한 느낌? 길가에 몰래 몰래 내가 가진 쓰레기 분말들을 다 뿌리고 오는 느낌이 들어, 집에 오면 조금은 개운했다. 아무 생각하기는 쉽지 않으니, 나의 시선을 길거리의 간판에 주자. 오가는 사람들에게 나의 시선을 주자.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걷자는 마음으로 3일을 걸었더니, 놀랍게도 많은 부분 내가 부드러워져있음을 느꼈다.


 저마다 겪고 있는 스트레스와 아픔의 총 무게 값은 같다. 단지 그 스트레스의 생김새가 다를뿐. 앉은뱅이가 귀머거리를 부러워 하고 귀머거리가 장님 부러워한다고, 세상 만물은 각자만의 스트레스가 분명히 존재한다.
 자식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식문제만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러워하고, 자식 문제가 없는 사람은 부모 문제가 있을 수 있으며, 부모 문제가 없는 사람은 배우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 모두가 없는 사람은 직장 문제가 있을 수 있으며, 직장 문제 조차 없는 사람은 본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고, 일상만 유지하자. 미쳐 죽을 것 같아도 일상이 유지되면 버틴다.

 라디오를 켜고, 그냥 걸어봐라. 이틀만.


 나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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