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토 달지 말고 빨리빨리.
국회에서 얼마 전 떠들썩하게 많은 뉴스를 장식했던 쟁점.
유명 관광지나 놀이시설 등을 줄을 서지 않고 빨리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일컫는 말.
이 영어 단어가 생각보다 광범이 하게 사용되는 걸 알았다. 그저 내가 일하던 팀을 가리키는 말이 다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옷을 제조하는 업에 종사하며 근래에 많이 든 생각이 옷을 만드는데 들어간 정성 보다 꽤나 가벼운 가격에 사람 들은 손쉽게 옷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도한 디자인 경쟁과 가격 경쟁이 만들어낸 일이
결국 소비자는 만족시켰을지는 몰라도 일을 하다 회의가 드는 빈도는 잦아지게 했다.
공이 많이 들어가는 디자인은 더 싼 곳 더 싼 곳을 외치며 제조국을 찾기 시작하고 인도네시아나 아프리카의 산 넘고 물 건너는 동네까지 파고들어 '이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옷을 겨우(?)'라는 생각이 들만한 가격에 기어코 만들어 내고 마는 세상.
그리고 산 넘고 물 건너 만들어진 옷은 금방 또 다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든 다른 디자인에 밀려나 버려진다.
일을 좋아하고 미쳐있을 땐 나에게 일이 많이 주어지는 걸 즐겼다. 머리를 굴려 그 일을 어쨌건 다 해치워 내는 게
스스로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고 시간이 흘러 부하직원을 두고 좀 더 큰 물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왔을 때
알았다. 내가 엄청난 쓰레기 제조에 일조를 했다는 썩 유쾌하지 않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한쪽 눈과 귀를 닫아야 마음 편히 일을 하겠구나 싶었다.
매주 수요일은 Fast Track 팀원들이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은 요일이었다.
그날 저승사자 아저씨가 들고 들어오는 상자의 사이즈로 우리 팀원들의 희비는 엇갈렸다.
지구 반대편 바이어가 보내오는 개발 요청 샘플들이 들어있는 패키지가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상자나 플라스틱 백의 패키지는 그 안에 옷이 몇 벌 들어있지 않음을 의미 하지만 라면박스 크기 이상의
박스가 전달이 되면 모두의 표정은 굳어졌다.
아직 3주째 완성이 덜된 샘플들도 있었는데 매주 개발 요청이 오다 보니 빨리빨리 개발을 끝내지 못하면 그만큼
샘플이 쌓이기 시작하고 마음의 부담도 똑같이 쌓였다.
어떤 옷은 부자재 한 가지가 바이어 마음에 안 들어 부자재 개발만 한 달째 하고 있는 샘플도 있었다. 아마 바이어와 면전 미팅을 했더라면 그만 예민 떨고 이 정도 비슷하면 그냥 컨펌 좀 해달라고 할 만큼 그 옷의 담당자는 무조건 똑같은 부자재를 개발해 내라고 매일같이 이메일로 닦달을 했다.
다른 팀은 바이어 쪽 디자이너와 디자인 개발을 협의하고 변경도 해가며 업무의 주고받음의 시간이 어느 정도 주어진다면 내가 맡고 있는 Fast Track 팀은 매주 수요일 도착하는 판도라의 패키지 박스 안에 들어있는 (한창 유행하는 옷을 구입해 가격 Tag 이 달려 있는 옷 상태로 보내짐) 샘플들을 똑같이 만들어내 원가를 산정하여 바이어 쪽에 최대한 빨리 발송해야 하는 한마디로 지랄 맞은 업무의 팀이었다. 잘 팔리는 옷을 최대한 빨리 만들어
유행의 대열에 합류해 보겠다는 바이어의 요청을 수행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을 하는 팀이라고 해도 과언은 분명 아니었다.
미국에서 패키지는 이틀이면 도착이 됐는데 도착하는 다음날부터 바이어의 닦달은 시작됐으니, 급한 그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됐지만 물리적인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메일부터 보내 닦달하는 그들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훅 하면 지나가 버리는 유행이란 것이 바이어도 나도 이런 상황 속에 처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게 뭐길래..
안 그래도 성격이 급한 난데 하필 업무도 내 성격 같을게 뭐람..
몸은 가만히 있지만 마음은 항상 전속력 질주를 하고 있는 기분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알았다.
뭐든 서두르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나에게 어느 날 친구가 낚시를 가자고 권유했고 머릿속이 과포화 상태인
어떤 날 퇴근 후 무작정 낚시터로 향한 적이 있다. 심신의 고요함을 만들기 위한 나 나름의 방편이었지만
낚싯대 앞에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뜯고 있는 날 보며 건넨 친구의 한마디.
"그런다고 고기가 잡혀주지 않아."
측은한 눈빛으로 몇 분간 날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불안한 기색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이 좀 창피했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휴대폰으로 메일함을 열어봐야 할거 같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낚싯대 앞에 앉아 내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들키고 난 뒤라 잠시 잊어버리려고 휴대폰을
만지지 않았다.
'맞아. 그럴 거면 여길 오지 말았어야지.. 잠시라도 잊자. 잊어버려 보자.'
그리고는 일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도 이젠 연습이 필요할 만큼 뇌가 망가진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손바닥 만한 물고기가 찌를 움직거리게 했고 무의식 적으로 낚싯대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제야 그곳이 회사가 아니라 친구와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나왔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상에서 빠져나옴이 왜 필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던 밤낚시였다.
이걸 알려주고 싶어서 같이 오자고 한 것 같아 친구에게 새삼 고마웠던 밤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물에 비친 달이 눈에 들어왔고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질거 같아 한참을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