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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30. 2023

글로 엮어진 세상, 집이라는 세계(하)

집에 관한 기록_2023.09.23.

외부에서 들어온 태양광과 천장에 달린 조명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사무실에는 포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라니와 나는 건축사님의 안내에 따라 사무실 가운데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공간이 주는 안정감 덕분인지 글로 엮어진 세상에서 마음을 주고받은 때문인지 처음 본 어른과 마주 앉은 상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건축사님은 라니와 나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어주신 뒤, 집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찬히 려주셨다.  시간 남, 건축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장인의 정신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참어른의 음이 느껴져 존경과 감사가 우러나왔.


메모지와 펜을 준비하지 않아 건축사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그 내용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철학이 담긴 집을 지어야 한다.

일회용 테이크아웃 용기, 유행하는 스타일의 머그컵, 도예가가 만든 도기, 유리잔 등 커피를 담아마실 수 있는 잔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우리가 쓰임과 가격, 취향에 따라 다양한 잔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는 건축주의 마음에 달려있다. 하지만 모든 재화가 그러하듯 컵도 집도 영원히 내 것으로 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쓰다가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어렵지 않게 팔 수 있는 컵은 어떤 컵일까? 유행 지난 머그컵 보다 도예가가 만든 도기를 찾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도기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왕 짓는 집, 철학을 담아 제대로 지어야 하지 않을까?   


둘째, 집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파트는 주인이 명확히 드러나는 주거 형태이다. 부부욕실을 비롯해 베란다, 드레스룸, 파우더룸까지 모두 갖춘 커다란 안방을 보면 알 수 있다. 큰 평수의 고급 아파트일수록 안방은 더 강조된다. 안방을 제외한 다른 방은 규모도 작고 위치도 좋지 않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집 밖으로 나가는 이유다. 아파트는 손님을 불러 모으기에도 어렵다.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집 한가운데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손님들이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

집은 구성원 개인삶을 존중하면서 가족을 함께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공간, 사람의 발길이 모여드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집을 짓는데 화합과 배려의 미덕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집에 관한 철학과도 닿아 있다.


셋째, 집은 미래를 내다보며 지어야 한다.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는데 치중한 집, 현재 시점의 욕구에 맞춘 집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건축주)는 늙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언제고 내 것일 것 같던 집은 언제고 팔아야 하는 재화의 일종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를 내다본다는 말은 실험적이라는 말보다 보수적이면서 보편적이라는 말에 가깝다. 우리 한옥처럼 세월이 지나도 그 모습을 잘 유지할 수 있으며 모든 연령의 세대가 만족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집, 누구나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집을 어야 한다.


건축사님은 내가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건축사님이 색연필로 직접 스케치하신 듯 보이는 집의 얼개가 올라와 있었다. 건축사님의 집에 관한 철학을 듣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화합과 배려의 미덕으로 사람을 잇는 작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중요한 사람을 잃고, 사람을 피하며 살아왔던 지난 삶이 집이라는 세계 안에서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처음으로 해보았다. 나도 어쩌면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집이 아닌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집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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