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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Oct 26. 2023

힘내세요(2)

그 보다 좋은 말

힘내세요(1) (brunch.co.kr)


2년 전 그날, 나는 차 기름을 미리 채워놓지 못했다는 핑계로 검정이 있어 일찍 가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 아빠에게 회사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치솟고 있는 유가에 매달 올라가는 주유비를 이런 식으로 조금씩 줄일 심사였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보였지만 가는 방면이었고 무엇보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나를 차에 태워 주었다. 오랜만에 같이 하는 출근길, 익숙한 침묵 속에서 불현듯 아이 아빠 휴대폰에 가입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각났다.


"아 맞다! 우리 어제 멜론 가입했잖아. 미스터 트롯 경연곡 듣자."


말이 뱉어져 나오는 속도와 휴대폰을 집어 쥐어 그에게 넘기는 속도가 엇비슷했다. 그리고 잠금 해제된 핸드폰을 그로부터 건네받은 시점과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온 시점이 엇비슷했다. 아니 모든 것이 딱딱 들어 맞았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음.ㅇㅇ 호텔 707호. 다와 가면 연락해. ^^


아침 7시 30분, 호텔 키 사진과 함께 날아온 밴드 톡 메시지. 입은 막혔고, 눈은 그대로 박제되었다.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 쳐서 살아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보낸 메시지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문자도 아니고 카톡도 아니고 밴드 톡이었다. 특정 관심사 혹은 특정 업무, 혹은 특정한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밴드 안에서 구성원 한 명을 지정해 보내는 메시지가 수신처를 잘못 찾아 올 확률은 극히 낮았다. 더구나 이른 아침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메시지를 잘못 보낼 확률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잠시 이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곱 살, 세 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아빠가 사라진 가정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그들로부터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기로 했다. 십 원짜리 동전 한 개만큼의 값어치도 없는 인정과 사과라 할 지라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또 짓밟힌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꼭 받아내야 할 것들이었다. 한 이틀, 아이 아빠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결국 자신의 외도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내연녀 역시 짧은 문자로 사과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이제 남은 것은 내 결심에 책임을 지는 일이었다. 나중에 어찌 될지언정, 당장 아이들 앞에서 이런 치정관계로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끓어오르는 화를 속으로 삼켰다. 울고 싶은 날은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앉아 한참을 울다 집으로 갔다. 10시, 9시 30분, 9시, 8시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점점 원점을 찾아가는 듯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쯤, 아이 아빠의 생일날이었다.  제과점에서 생일 케이크를 결제하고 있는데 푹 하고 무엇인가 터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바짓가랑이를 내려다보았다. 가랑이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핏빛.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카드를 내었는지, 현금을 내었는지, 포인트 적립은 했는지, 할인은 받았는지..... 케이크 상자를 챙겨 들고 나와 숨 쉴 새도 없이 차를 몰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차에서 내렸다. 차문을 닫는데 피범벅이 된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보다 정직한 몸이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슬라임 카페 한가운데서 그때 그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딸아이가 따라왔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흘러내린 슬라임을 통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일이 생겨서 오래 있을 수 없어. 엄마는 자리를 정리하고 곧 나갈 거야. 마지막으로 물을게. 필통 꾸미기라도 할 거라면 얼른 가서 재료를 골라봐."

딸아이는 말없이 필통 꾸미기 재료대 앞으로 가서 필통과 그 위에 올라갈 장식을 골랐다. 자리를 정리하고 딸아이가 골라놓은 재료 접시를 받아 들고 카운터로 갔다.

"포장해주세요."

"엄마, 우리 이거 하고 가면 안돼?"

"응. 안돼. 엄마가 지금 일이 생겨서 나가야 해."

"하고 가고 싶어."

"가자. 가서 해."

"엄마! 갈 거야? 나 안가. 안 갈래."


좀 전까지 하기 싫다던 필통 꾸미기를 굳이 슬라임 카페에서 완성하고 가겠다는 큰 아이의 고집에 둘째의 떼쓰기까지 더해졌다. 그러는 중에도 붉은 폭포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미 눈치 빠른 몇몇 어른들의 시선이 내 하의에 머물고 있었다. 내 꼴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돌아다니는 암캐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 인간으로 갖고 있던 체면과 존엄이 파사삭 바스러지고 있었다.


"엄마 먼저 나가서 차에 있을게. 둘이 앉아서 꾸미기하고 와도 좋고 챙겨 나와도 돼."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차는 가게 바로 앞에 있었다. 차문을 열고 주저앉다시피 운전석에 앉았다. 피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축축하게 젖은 바지가 엉덩이와 허벅지에 딱 달라붙었다. 핸들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렸다.


"엄마 큰일 났어. ○○이가 똥 마렵다고 남자화장실에 들어가서 안 나와."

"조금 있으면 나올 거야. 화장실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나와."

"응가 닦아야 하면 어떡해?"

"그럼 네가 좀 해줘. 엄마는 어른이라 남자 화장실에 더 들어가기 어려워."

"내가 들어가도 될까?"

"............"

"알았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첫째가 더 이상의 대꾸 없이 차에서 내렸다. 엉덩이에 피범벅을 하고 새끼 똥 치우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나란 존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위해 태어난 한낯 걸레짝이 아닌지...  모든 게 부질없고 값어치 없이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자부해오던 양질의 한부모 육아가 처절한 발악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됐다.사이드 미러에 둘째 손을 잡고 걸어오는 첫째의 모습이 보였 다. 내 믿을 구석이었는데... 둘째가 아무리 별나도 배려 많고 착한 첫째 덕분에 험난한 여정을 잘 지나왔는데... 왜 이번 어린이날엔 저 녀석마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이처럼 소리 내어 펑펑 울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좀 살 것 같았다. 어른이 그것도 엄마가 소리 내어 펑펑 울고 있었는 장면만으로 아이게 게 큰 충격이었을 텐데 나란 인간이 참 모자라서 멈출 줄 모르고 나가버렸다.

"엄마. 왜 그래?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엄마 노릇이 너무 힘들어. 오늘만 같으면 너희 엄마 정말 못하겠어. 못해 먹겠다고. 엉엉엉."


하지 말아야 할 나쁜 말을 하고야 말았다.


"엄마 미안해. 내가 말 안 들어서...."


첫째도 울고 나도 울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한바탕 울어재끼고 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미 슬라임 카페를 빠져나온 지 30분이 넘었으니 사고가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더 늦지 않게 슬라임 카페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 사장님이 받으셨다.


"죄송하지만 아까 카운터에 계신 여자 직원분을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여자 직원이요?"

"네. 여직원분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요."


사장님은 이해불가란 듯 한참을 머뭇거리시다 점원에게 전화를 돌려주셨다.


"아까 카운터 기준 왼쪽 편 코너 자리에 앉았던 아이 엄마예요. 제가 갑자기 부정출혈이 일어나서요. 혹시 제가 앉았던 자리 의자에 혈흔이 남아서 다음에 앉으실 분이 불편해하시는 일이 생길까 봐 연락드렸어요. 제가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 돼 부득이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슬라임 카페입니다. 자리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내시고 남은 시간도 아이들과 즐겁게 보내세요."


'힘내시고...'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이겠지만 점원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한참이나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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