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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Aug 03. 2023

산에 오른다는 것은

휴직일기_2023.07.27.

아이들 아빠에게서 카톡이 왔다.

다짜고짜 이름 모를 사이트 주소만 떡 하니 보내 놓고는 한참 지나 보내줬던 링크 확인했냐고 묻는다. 텍스트 건 발화 건 간에 대화에 서론, 본론, 결론 삼단 구성을 갖추고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사이가 됐는데 나를 너무 편하게 혹은 만만하게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대화 방식을 지적하는 것조차 의미 없는 사이니, 어쩌겠나 참아야지.


아이들 아빠는 휴가철이니 아이들과 처음으로 캠핑을 떠나겠다고 했다. 저나 나나 아이들 챙기는 데는 모자람이 많은 사람들이라 야외에서 오롯이 셋이서만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말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 아빠는 분명 파워블로거가 쓴 그 시설 좋은 캠핑장 후기를 나보다 딸에게 먼저 보냈을 테고 아이들 마음은 이미 그 캠핑장에 가 있을 게 뻔했다. 아이 아빠가 보낸 톡은 과시가 섞인 통보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웃으며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것 밖에 없었. 


그래 그런데 그러면 나는 어쩌지?

달고 쓰고 아린 알맹이들이 다 빠져나간 나란 쭉정이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집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을까? 아이들 생각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나... 어쩌나... 그래! 마음이 심란할 때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좋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 산으로 가기로 했다. 폭염경보 문자가 시끄럽게 울리던 그날에, 석 달째 묵혀둔 영남알프스 8봉 완등 도전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영남알프스 8봉 가운데 가지산과 고헌산은 휴직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다녀왔다. 간월산과 신불산은 가을 억새가 참 예쁘다. 그럼 이번엔 어느 산으로 갈까? 오지 않을 아이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걱정과 서운함 그 경계를 부지런히 넘나들지 않으려면 집에 최대한 늦게 들어가 그대로 잠들어 버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최대한 멀리... 밀양 표충사 아래에서 출발해 천황산과 재약산 연계산행을 하기로 했다.


폭염이라 그런지 산을 찾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듯했다. 등산객이 찾지 않는 산에는 수풀과 벌레가 위용을 떨쳤다. 사람의 손이 닿은 임도나 데크길을 제외하고는 수풀이 등산로를 뒤덮을 정도로 번져서 길을 잃은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는 길이 아닌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쯤에 하산객이 나타나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 험한 길을 얼마나 더 가야 하지. 풀이 너무 무성하고 벌레도 너무 많아. 뱀도 나올 것 같아. 포기하고 돌아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때에는, 다른 갈래에서 합류한 등산객이 나타나 고지가 멀지 않았다고 힘을 내라고 말해주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준 그들 덕분에 나는 그리 많이 헤매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본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들은 그들이 내게 준 선물과도 다름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길을 알려주고 살아갈 용기를 준 뒤 떠나간 사람들이 있다. 하얀 종이 위에 흩어진 점들이 각도를 달리하며 뻗어가다 접점을 이루고 다시 본래의 길을 가듯 내 인생에 중요한 기억을 남기고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람들.


화란이네, 조선옥 선생님, 나 사모님...


그 얼굴들을 점처럼 그려본다.

그 이름들을 점처럼 작게 불러본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미처 몰랐던 것들과 만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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