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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땐땐 Feb 04. 2021

어떻게 그것까지 제가...

학습능력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 업무를 하고 있다. 봐도 봐도 계속 보이는 오탈자와 확인하고 확인해도 나오는 엑셀 오류,, 참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내 실수를 내가 확인하며 나를 다그친다. 이러니 불안할 수밖에,, 그런데 바로 그때!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소리라는 형태로 나를 위협한다. 바로 전화다. 발신전화를 보니,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짧은 순간, 내가 외부로 발송한 메일들을 머릿속으로 스캔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스캔하겠는가,, 그냥 포기하고 전화를 받는다.

수신자: "네, 기획팀 박빵빵 대리입니다."
발신자: "안녕하세요, ooo, ooo입니다."
수신자: "네, 안녕하세요."
발신자: "운영비 관련해서요, 시설물 안전점검 낙찰률이 과거 낙찰률과 다른데 그 이유가 뭐죠? 아! 그리고 가드레일 설계내역서에 잡비가 포함되어 있던데 이건 뭐죠?"
수신자: "아,,, 아,,, 제가 담당자 확인하고 바로 연락 드겠습니다."
발신자: "아,,, 네,,,"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이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예산담당이라도 어떻게 세세한 것까지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전화가 아닌 대면으로 보고할 때 일어난다. 이사회 또는 임원 보고 상황에서 느닷없이 질문 공세가 들어온다. 피할 곳이 없다. 그때는 확인하고 바로 연락도 못 드린다. 날 것 그대로가 드러나는 느낌, 온몸에 털이 삐쭉. 매번 쪽지시험 치는 느낌이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그것까지 제가...


전공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그 많은 걸 다 알 수 있겠나,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만드는 게 내 업무 아닌가. 자료를 만든 사람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모든 직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할 수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료를 만든 주체로써 내가 자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항상 불안감에 찌들어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다가는 단명하기 십상이다. 나의 경우에는 불안감을 안고 일이 별 탈 없이 마무리되면 안도감만 남게 되는데 이건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다. 실력으로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일을 할 때 또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불안감에 휩싸이면 시야가 좁아지고 일을 지속할 에너지까지 부족해 마냥 피하고 싶어 진다. 따라서 불안감이 들 때는 실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도망치며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그럼 자료에 대해 얼마나 공부해야 되는가?

회사의 전반적인 내용이 담긴 예산자료나 평가자료를 항목별로 세세하게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토목공학을 다시 전공하지 않는 한. 만약 질문자가 전공자로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디테일한 질문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담당 직원과 함께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기획팀의 경우, 회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수준의 자료를 만들기 때문에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디테일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방향성이 제시된 자료를 검토하는 경영진 및 다른 이해관계자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떠한 질문을 던질까?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상대방으로 빙의되어야 한다. 특히 그 캐릭터가 굉장히 까칠하다는 걸 염두하고.

"음,, 나는 까칠하다. 음,, 나는 까칠하다. 음,,, 까칠해지니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나온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시크릿 가든 #명대사 #길라임 #구석기

이 질문에 이미 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 긁적,, 아,," 이런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강력한 태클이 들어온다. "이러이러한 문제점이 발생될 수 있지 않나?" "이 방향보다는 저 방향이 더 합리적인 거 같은데?" 아,,, 숨 막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억하자. 이건 시뮬레이션이었다는 사실을!!


자료를 완성하기까지 이러한 빙의를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빙의된 까칠한 내가' 더 이상 질문할 거리를 못 찾을 때까지 고민하고 공부하며 자료를 완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료에 대한 자기 확신이 생길 때까지 공부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면 머리를 긁적긁적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경우라도 최소한 나에게 졌! 잘! 싸!라고 위로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졌! 잘! 싸! 는 나름 자부심의 표현이다. 이것이 두려움에 갇혀 헤매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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