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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Jul 22. 2021

느낌의 즐거움

내 감각이 가닿은 순간들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긴다. 함께하는 사람 없이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 감각이 진실로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조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해지며,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의 끈이 엉켰을 때 잠깐 멈춰 생각을 풀어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챙겨야 했던 사랑과 배려 같은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내 자신에 온전히 집중하며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고민하는 순간이 좋다. 혼자 있다는 것은 주위 많은 것들에 내 모든 관심을 쏟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기도 하다. 말을 나눠야 할 의무가 사라지니 그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을 듣고 보게 된다. 말을 끊임없이 해야 할 때는 잘 들리지 않던 사람들의 발소리나 아주 드물게 선명해지는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카페 알바생의 표정, 들뜬 아이의 발걸음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오는 순간.



가끔 동네가 지겨워질 때면 무작정 합정행 버스를 탄다. 빈자리에 앉아서 지도 어플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기분에 따라 갈 곳을 정한다. 합정과 그 옆 망원에는 내 집중을 돕는 차분한 분위기의 장소가 많다. 며칠 전엔 비가 와서 그런지 기분이 축 처져서 몸과 마음을 축 늘어뜨릴 수 있는 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그날따라 인기 많은 1인 소파가 비어 있어서, 집에서 타 먹었어도 무방했을 맛의 아이스 초코와 함께 금세 노트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이 복잡한 현대 문물에서 그만 눈을 떼고 싶어져서 화면을 덮고 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소설 속의 뒤엉킨 감정들을 생각하다가 더 피곤해져 에라 모르겠다 잠깐 쉬기로 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눈을 초점 없이 두고 멍하게 이 공간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한다. 커피 그라인더 소리, 책 넘기는 소리, 포스기 누르는 소리, 크래커 씹는 소리, 타자 치는 소리, 웅얼거리는 대화 소리. 조용한 공간이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실 그 적막을 아주 다양한 소리들이 채우고 있었다. 그 소리의 근원들을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뒤를 돌아보려면 자세를 바꿔야 했기에 그러진 못했다. 무언가 몰두할만한 것이 필요했던 요즘이었는데 생각을 비우고 집중할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된다.




혼자 여행할 때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자극이 특히 더 증폭되어 느껴진다. 새로운 곳에 왔다는 흥분감과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더해져 온몸의 감각 신경이 활성화된 탓이기도 하다. 학기 중 추수감사절 방학을 맞아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부는 시카고 거리를 걸을 때나, 봄날을 맞아 꽃이 흐드러진 삼청동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을 볼 때면 색채 높은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카페에 앉아서 따뜻한 머그잔을 감싸들고 대화하는 코트 차림의 직장인들, 울창한 나무 아래 비눗방울 쇼를 보며 동그란 눈을 하고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이제 가야 한다며 손을 이끄는 부모님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것처럼 평소보다 더 자세하게 보이고, 기억력이 나쁜 나에겐 그런 기억들만이 미처 거름망을 통과하지 못하고 선명히 남는다.



그렇지만 함께 있을 때도 주변을 감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와 화를 할 때면 이따금 정적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건 이 대화가 재미없어서도 아니고,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다음 할 말이 바로 생각나지 않을 뿐이다. 그 상대와 있을 때 자주 정적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할 말을 생각해내려고 분투하겠지만, 상대가 이 정적을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건 주변에 슬쩍 주의를 돌릴만한 여유가 된다.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내 신경의 영역을 넓힌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듣지 못해도, 제스처나 표정, 말의 톤, 자세 등 1초 이내로 슬쩍 보이는 것들을 기억하는 식이다. 갈 곳이 너무도 많은 이 세상에서 우연하게도 (혹은 운명적으로) 나와 같은 공간에 있게 된 이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은 함께 있는 사람과의 정적을 깨는 대화 주제가 되기도 한다.




한 번은 바 한쪽에 앉아서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은 번화가에서 꽤 떨어져 있어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오는 사람은 적었고, 주로 사장과 친한 손님들이 가게를 드나들었다. 해가 떴을 때 얻은 공허함을 해가 지면 채우러 오는 것 같았다. 단골손님들끼리도 서로 돈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바에서 즐겁게 보낸 수많은 시간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바라왔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면서 일종의 소속감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사장은 들어오는 손님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골고루 한 번씩 말을 걸었지만, 그가 대화 도중 자리를 뜬 이후에도 대화가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팀이 있는 반면 그게 옆사람과 나눈 대화의 전부인 팀도 있었다.



그날 바 맨 끝에 앉은 두 명은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내가 들어온 후 조금 뒤에 여자가 앞서 걸어와 표정 없는 얼굴로 ㄴ자 모양의 테이블 끝에 앉았고, 외국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뒤따라 들어와서 어색하게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날의 기력을 모두 소진한 듯한 지친 표정이 드러났다. 둘은 줄곧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 처음에 술을 주문할 때를 제외하면 서로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내 대화에 정적이 생길 때마다 힐끗 보았던 둘의 무섭도록 무심한 표정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을 거였으면서 함께 와야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괜히 그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을지 추리해보았다. 둘은 지친 연인일 수도, 혹은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서로를 아끼지만 잠시 다툰 친구 사이이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바에 오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온 사이였을지도 몰랐다. 둘의 실제 관계와 상황이 어떻든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두 사람을 보는 건 나를 왠지 슬프게 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그들은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주변의 것들을 관심 있게 보게 되면서, 그러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순간일지도 몰랐다. 나와 닮은 모습을 한 그들에게 괜히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고 말 한번 나눠보지 않은 그들 인생의 한 순간을 감각하면서 다른 어떤 감정들보다 친밀감이 자라났다. 그건 내가 제 3자로서 그들의 많은 부분을 몰랐기에 가능했다. "듣는다는 것은 책임감이 부여되는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니 나는 그것에서 자유로웠다. 느낌이 즐거웠던 건 책임질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내게 이기적으로 감각당한, 내가 일방적으로 친밀해진 그들에게, 받은 위로에 대한 감사를 보낸다.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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