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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Aug 11. 2021

내가 떠나온 세계



무슨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능을 이제  마치고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수원시의 3들을 모아다가 장기자랑 같은  시켰던 행사가 있었다. 초대 가수도 있었던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 노래 대표들이 나와서 발라드(임창정) 부르고, (야다) 부르고, 알앤비(에즈원) 불렀다. 우리 학교 대표는 당연히 나였다. 1,2,3학년 통틀어 하나 있는 예체능 반에 유일한 실용음악과 보컬 지망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적어도 경기도에선 내가 노래를 제일 잘하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조금도 떨지 않고 혼자 MR 들고 대기실로 향했다.



내 순서는 두 번째였다. 앞 무대가 순조롭게 끝나고 금방 나의 차례가 왔다. 수원에 있는 고3들이 다 모였으니 내 평생 그렇게 많은 관객들 앞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이제야 내 실력에 걸맞는 무대 규모를 가지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차분하게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거미의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를 선곡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앞부분은 나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청중들의 마음을 적시고, 뒷부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가창력으로 마무리하며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나는 학교의 자랑으로 멋지게 졸업하는 것일까? 덤덤한 표정의 나. 겁나 카리스마 있어.



하필 초반에 내가 노래를 하는 바람에 뒷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염려하면서,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이어진 무대를 감상하러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관객석에서 들으니 뭔가 이상했다. 가사가 하나도 전달되지 않았고 볼륨은 큰데 소리가 다 뭉개져서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 음향이 엉망이었다. 내 노래라고 제대로 스피커 밖으로 나갔을 리 없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있었다. 아 여기 모인 이 친구들은 그냥 수능이 끝났다는 게 좋았구나. '앞에서 노래하는 쟤가 누군지 몰라도 그냥 신나 죽겠으니 냅다 소리를 질러보자'였구나. 그랬구나 너희들...... 과연 이후 순서도 모두 광란의 박수와 환호소리로 마무리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끝난 건전한 행사였다. 커다란 공연장을 올챙이처럼 우르르 빠져나가는 인파에 섞여, 어딘지 모르게 허무한 가슴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삼 년 만에 보는 중학교 동창 H였다. 같은 반이었던 때에 둘 다 노래를 좋아해, 함께 화음을 섞어 부르곤 하던 친구였다. 에코의 '행복한 나를'을 불러 어디 대회도 같이 나가고 그랬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H는, 무대에 등장한 나를 보고 너무 반가웠다며 대뜸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고 했다. 당시 H의 언니가 악기로 공연을 도와주고 있던 솔로 가수가 있었는데, 피처링을 해줄 여자 보컬을 찾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 나는 문자로 받은 주소지를 찾아갔다. 지하에 있는 깔끔한 녹음실이었다. 부스에 들어가 평소에 연습하던 가요와 팝송을 몇 개 부른 게 오디션 같은 거였다. 이후 그 솔로 가수의 앨범에 수록곡 하나를 녹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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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 솔로 가수와의 인연은 그 한 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이후 같은 기획사의 힙합듀오 팀과 인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3집을 준비하고 있던 그 팀은 타이틀곡을 부를 파워풀한 여자 보컬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 시기에 내가 녹음실에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나는 3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 힙합팀의 3집과 4집에 총 다섯 곡을 녹음하고 방송활동을 같이 했다.



오후 5시쯤 녹음 부스에 들어가면 새벽 1,2시가 되어야 나오곤 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앉아서 쉬거나 물을 떠 올 때를 제외하곤 밀도 높은 녹음 작업을 했다. 한 곡 전체를 보컬로 채우는 게 아닌 후렴 부분만을 부르는 것임에도 그렇게 오래 걸렸다. 당시엔 내가 녹음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똑같이 오래 걸리는 걸 보면, 매뉴얼을 가지고 녹음에 임하는 프로페셔널 보컬과 나는 영 거리가 있는 거 같다.



즐겁고 고되게 녹음한 작업물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되어 나오는 경험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CD를 손에 들고 신기해하는 것, 거기까지는 좋았다. 이후에 나는 내내 다이어트와 성형을 종용받고 여러 사람에게 팔뚝을 꼬집히며 방송과 행사를 다녔다. 물론 억지로 시킨 사람은 없다. 난 계약된 가수도 아니고 연습생도 아니어서 서류상으로 묶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어릴 적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큰 무대와 다수의 관심을 욕망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성인도 되기 전에 생긴 이 우연한 기회가 삶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 일지 모르니, 버티며 그 세계를 지켜보았던 거다.



인지도가 대단히 높은 팀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멀리 가는 행사와 방송이 대부분이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압구정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차에 탄다. 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탓에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불편하게 앉아, 반나절을 달려 녹화장에 도착한다. 드라이 리허설이라는 것을 한 뒤, 대기실이 있으면 거기에서, 없으면 차 안에서 코디 언니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는다. 원래 내 나이보다 훨씬 들어 보이는 두꺼운 화장을 하고 카메라 리허설을 한다. 그 후 수정 메이크업을 하며 또 몇 시간을 마냥 기다린다. 해가 다 지고서야 시작한 본 무대는 녹화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브 기회가 한 번뿐이다. 인기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분 남짓한 무대를 끝내고 내려오면 알 수 없는 허무함과 함께 피로가 몰려온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나는 편한 자리에 앉지 못한다. 메인 가수 두 명의 지정석이 있기 때문에 피처링 나부랭이인 나는 쿠션감이 가장 없는 중간 자리에 앉는다. 속눈썹을 떼어내고, 머릿속에 빼곡히 꽂혀있는 100개의 실핀을 하나하나 빼면서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이 된다. 나는 말도 안 되게 화려한 방송 화장과 머리를 한 채로 강남 한복판에 내려져 새벽 2시가 막차인 버스를 기다린다. 집에 도착해 이중 삼중 세안을 하고 침대에 멍하게 누워있다 보면 파란 새벽 해가 들어온다. 24시간 동안 내가 노래 한 시간은 다 합쳐도 10분이 안 된다. 나는 좋은 공연을 하고 싶은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데...... 나중을 위해 이런 일쯤은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이건 정말 좋은 경험일까? 잘 모르겠으니까 일단 계속해보자.




그렇게 2년이 좀 넘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건 이 세계에 없다는 것을. 나는 '좋은 과정'을 원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우습고 하찮은 말일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송을 하는 것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녹화도 라이브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이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농담 수준은 나이 불문 참담했고, 성희롱과 음담패설이 난무한 현장에서 끊임없이 내게 행해지는 외모 지적은 스스로 병적인 검열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저체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매일매일 몸무게를 재며 손에 잡히는 허벅지 살과 팔뚝 살을 잘라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이런 상황들을 견디는 것이 정말 음악가로서 나를 성장시키는 일일까 자문해 보았다. 어떤 멋진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해도, 이런 과정이 불가피한 곳이라면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그곳을 가뿐히 떠나왔다.



혹여 내 자리가 있을까 위태롭게 기웃거렸던 20대 초반의 그 시간은 많은 걸 알려주었다. 때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전부일 수도 있음을, 많은 이들이 의미를 찾아가며 걷는 길이라 해도 내겐 아닐 수 있음을, 나에겐 더 많은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자유가 있음을 말이다.



분명 그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을 거다. 팀 멤버였던 두 사람이 나의 재능을 인정하고 지원 주려 했던 마음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다만 그 방식과 태도가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떠나온 세계. 이제 그 세계는 그저 생생한 경험으로, 떠나왔기에 웃을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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