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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C May 19. 2024

[회상] 방관하는 냉철함

그 의미를 깨닫고 사랑하기까지

New Season -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 봄


중학교 2학년, 내겐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교실은 매일 아침 봄을 맞이했으며, 그 밝음 속에서 나는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자유를 만끽했다.

깐족거리며 장난기로 가득 찬 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그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받아준 친구들 속에서 보호받았고, 밝은 분위기의 교실을 만들어나가는데 그들이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명랑함 속에서 나는 홀로 사랑을 키웠다. 오랜 기간 한 사람을 마음에 두었으며, 친구들은 짝사랑 앞에서 수줍어하는 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즐거워했고 은근히 응원해 줬다.



자칫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광대 역할을 하며, 자존심을 내려놓는 희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내 곁에서 웃고 떠드는 밝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에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밝은 교실과 친구들이 좋아서 나는 자신을 내려놓으며 희생을 선택했지만, 친구들은 그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고 인정해 줬으며 교실의 "분위기 메이커"라는 역할을 내게 안겨줬다.


"우스꽝스러운 광대와, 그를 인정하고 함께해 주는 관객" 그 명확한 역할 분담 속에서 모두가 충실했기에, 밝은 교실이 유지될 수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할 정도로 나는 멍청했다. 광대 역할을 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분위기 메이커"라는 역할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밝은 교실에 익숙해지며 안정감을 느꼈고, 행복한 날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안일함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Inferno - 내가 괴물이 된 날


장애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신음 소리를 내고 몸을 비틀고 있었다. 거울에 비춘 것은 평소와는 다른 괴물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던 나는: 행복이 계속되리라 믿은 교실에서 초조함 속에 자신을 가뒀고,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흔들리며 삐뚤어진 인식 속에서 자신을 바라봤고 "친구들 눈에도 나는 괴물로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겨울방학, 나는 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개학을 하고 15일 뒤에 학교에 복귀했다. (회복됐을 것으로 기대한) 틱 장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발병했고, 불안 속에서 자신을 잃은 나는: 스스로를 "교실의 괴물"이라 여기게 되었다.


'새로운 교실'에서 만난 학생들 속에서 이해 못 할 행동을 하는 괴물은 배척되기 쉬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왕따를 당하는 나를 보고만 있는 선생님 눈에도 "나는 괴물로 비쳤을 것"이라고 여긴 나는, 마지막 보루였던 담임 선생님의 따스함을 외면했길 이르렀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여기는 나를 보호해 주고 감싸 안아주려는 선생님. 그 품에서 빠져나간 나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Guilty Crown - 속죄를 위한 결심


성인이 된 나는 꾸준한 치료를 받으며, 스스로 장애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의 여유 속에서 가치관에 변화를 줄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가장 바라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면서 반성했고 그렇게 스스로 많은 것을 바꿔냈다.


괴물이었던 내가, 자신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창을 바꿔내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통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를 바꿔낼 수 있는 힘은 오직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에서 괴물인 나를 방관했으리라 생각한 선생님들이: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길 기대하며 (아픔 속에서 학생을 보호할 책임을 통감하는) "가시의 왕관"을 쓰고 있었을 것을 떠올렸고, 그 냉철함을 알아주지 못한 내가 속죄하는 방법은: 사회인으로 성장하고 다른 누군가의 교육자가 되었을 때, "죄의 왕관"을 쓰고 그들이 내게 베풀었던 가르침을 이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내가 없을 때 그가 계속 힘들어할 것을 안다면: 의식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거리를 두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따뜻한 위로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길들이는 무책임한 짓이며, 그를 돌이키는 데는 적잖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누군가를 '나 없이는 살지 못하는 존재'로 길들이는 것은, 교육자로서 매우 무책임한 짓이며 "위로를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한" 결과로 이어지게 한다.

 그를 숙지하며, '방관하는 냉철함'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은: 미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이에게 "최소의 가르침"을 주고, 스스로 빠져나가고 올바른 사회에 자리 잡도록 돕는 것이 교육자가 갖춰야 하는 신이자 '교육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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