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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28. 2015

11. 시 쓰겠단 시

시 쓰겠단 시

1
한국 현대시란 것들은 문학이란 제 이름만 믿고 읽으면 무릎을 치게 하는 게 아니라 멍을 때리게 만드니 그야말로 ‘학’을 떼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다. 나보고 읽지 말고 채우라는데 거기까진 참을 수 있겠으나 좀 부어볼라 하면 ‘는 페이크다 이 병신아!’하면서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도무지 채우려야 채울 수가 없다. 그럼 나는 그 놈의 빠른 발에 감탄하면서 내뱉는 것이다.

와... 시발...!

이렇게 끼를 부리다니, 참으로 개시끼가 아닌가.

2
내 오른 엄지가 왼 엄지보다 근사하다는 걸 발견하고 이 새끼를 잘라내 버리기로 했다. 손톱이 자라지 않은 지는 이미 오래다. 엄지의 언어는 놀이공원 앞에서 볶아 먹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렇다고 내 왼 엄지를 잘라 붙일 순 없어 어디 썩어가는 엄지 없나 놀이공원 옆 무덤가로 갔다.

위치의 사무실, 좀비의 여인숙, 뱀파이어의 다방인 이곳에 작은 인간 하나가 잘라 갈 손가락이 없을 리 없다. <사는 곳이 서울 시인 남자 여기 잠들다> 잠시 앞에서 합장을 하고 읊조렸다. 이따다키마스.

봉분을 파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잘 빠진 해골 한 구가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근데 그의 엄지손가락이 탐스럽게도 따봉을 하며 곧추 서있는 게 아닌가. 썩은 살점이야 일단 붙이면 살아나겠지 하며 떼어가려던 찰나, 그의 왕따시만한 엄지발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온 몸이 앙상했음에도 엄지발가락에만은 살이 오동통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말해왔는데 이 시민은 발가락으로 말해왔구나. 만약 이걸 붙일 수만 있다면, 오금이 저려 왼손으로 자위했다. 발가락이고 손가락이고 손도 못 대고 돌아왔음은 물론이다.

3
시력이 나빠 어렸을 때부터 안대를 썼는데 어느 날 밤엔 몹시 눈이 시렸다. 세상이 명료했는데 눈이 부시니 한 치 앞도 못 보겠더라. 한 쪽 눈을 감은 채로 집에 와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구멍에 위성이 박혀있었다. 거기에 가는 게 아니었다. 이제 밤이라고 싸돌아다닐 수 없게 됐다 생각하니 숨이 막혀 월식사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토록 빛을 구걸해왔으니 이는 오히려 바라던 바가 아닌가. 다만 당분간은 이 시어린 눈을 어쩔 수 없어 손톱달로 살아가겠다. 앞으로는 사랑도 깨물어 먹지 않고 사탕처럼 한 겹씩 녹여 먹어야지. 일찍이 녹여 먹었던 이들은 뭘 좀 알았던 사람들이었단 걸 이제야 알겠다. 오른 엄지 손톱은 이제 자라지 않아도 좋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전의 시를 쓸 때까지 나는 한번도 시집을 읽지 않았다. 국문학을 전공했다 보니 자연스레 시를 접하긴 했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시집을 찾아 읽은 적은 없었다. 이와 더불어 내 글에 대한 부끄러움이 들었는데, SNS를 통해 글을 쓰다보니 시선을 의식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았고 양분이 없이 글을 쓰다 보니 언제부턴가 내 글이 동어반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고 책을 읽어 글의 양분을 얻기로 했다.

유명한 문학 평론가인 신형철 선생님의 저서들을 읽기로 했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학교에 1년 동안 문예비평론을 가르치셨다는데 그땐 내가 휴학중이어서 그 분의 수업은 듣지 못했다.  시나 소설을 읽지 않고 비평서를 읽기로 한 것은 문학 그 자체보단 문학을 이루는 이론을 접하면 내 글이 보다 탄탄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 하나같이 의미심장하고 엄숙한 제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엄숙한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옮겨 적으며 글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가다듬었다.

문학은 '나'를 운송하는 나룻배 따위가 아니라 무수한 '나'들을 발명하는 기계다. - 몰락의 에티카 364p
이 시인의 시가 낯설고 매혹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이 시인이 다루고 있는 세계, 그 세계와 조우하고 있는 (비)자아의 모습이 낯설고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 몰락의 에티카 365p
'가지고 있지 않은' 작가는, 나는 이렇게도 쓸 수 있고 저렇게도 쓸 수 있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프로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라이터이지 작가가 아니다. '가지고 있는' 작가는 이를테면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쓴 모든 것들은 어떤 필연성의 산물이 된다. 그런 필연성이 없다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 몰락의 에티카 666p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 느낌의 공동체 275p
좋은 이야기들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함이 있어서 이런 말이 들린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 정확한 사람의 실험 144p

2주 정도가 걸렸다. 세 권의 책을 읽는데까지. 글을 쓰는 나에게 역사란 것이 있어 변곡점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시간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깨달음의 시간을 보내고 그 깨달음을 글에 담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내 글이 시의 풍모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이체 시인은 시인이 되기 위해 1년 간 1000권의 시집을 읽었다고 한다. 진부하지만 내가 얻은 깨달음은 '나는 모른다.'였다. 무엇이 시인지,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지,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를 잡으려 했던 때, 나는 한번도 시를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장난' 뿐이다. 문학은 학을 떼게 만드는 것이고, 시가 내 앞에서 끼를 부리며 약올리니 개시끼다. 그리고 나보다 근사한 내 글을 잘라내 거기에 시인의 글을 붙이려 할 것이지만 시인은 손가락이 아닌 발가락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금이 저리게 무서워질 것이다. 나는 사람인데 그들은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그들이 될 수 있을까.

시의 무게감이 내 눈에 박혀 버렸다. 그것은 달과 같이 생겨서 밤에도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더 이상 밤에 기대 글을 쓰지 못한다 생각하니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 빛은 내가 그토록 얻기를 바라왔던 빛이었다. 나는 좀 눈을 감고 있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이전의 내가 사랑을 탐구한답시고 그것을 깨물어 먹었다면 이제는 녹여먹을 것이다. 한겹 한겹 그것의 작용을 음미하며 그것을 전부 말하고자 할 것이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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