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씩씩한 스텔라 Oct 25. 2024

남편을 속인 가증스러운 여자

"내가 너 같은 년한테 걸리다니"

2024. 9. 3. 화 

  

2023. 4. 6. 목요일, 유책이 와 그 여자가 사귄 지 200일이 되는 날이자 내가 보낸 축하 선물 상간소장이 도착한 날이다.  내가 소장을 보냈다는 사실을 그 여자는 당연히 유책이에게 말할 것이고 그럼 유책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예상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근무를 시작할 즈음 유책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니 받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무실로 전화했더니 대신 전화받은 직원이 조퇴했다고 한다.

역시나 둘이 소장을 놓고 충격에 빠졌겠구나.  내가 받은 충격과 배신감의 반도 안 되겠지만.      



매일 일이 많아 야근이라던 유책이가 다 썩은 얼굴로 7시도 안 됐는데 집으로 들어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말도 없이 작은방으로 들어가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 차키를 꺼내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마나 깊은 한숨인지 주방에 있는 나한테까지 들렸다.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아는 척하지 말자. 오늘 하루만 수십 번을 되뇌었던 말이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저녁 안 먹었지? 나와~ 저녁 같이 먹자”     


‘오늘은 일찍 왔네’가 비꼬는 말처럼 들렸을까. 유책이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거실로 나왔다.

4인용 식탁에서 늘 셋이서만 저녁밥을 먹던 나와 아이들.

유책이를 보며 빈자리에 앉으라는 나의 손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 날 쏘아보더니 드디어 첫마디를 했다.     


“내가 너 같은 년한테 걸리다니”     


밥을 먹던 아이들이 얼어붙었다. 내 심장도 칼에 찔린 듯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밥 먹어 차려줄게”

아이들 앞에서 싸움이 날까 봐 얼른 일어서서 주방으로 돌아섰다.

버텨낼 수 없는 절망감이 나를 죽일 것 같았다.      


변호사가 그랬다. 상간소송이 시작되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온다고. 데리고 살 놈인지 버려야 할 놈인지. 그래서 불륜을 알게 되면 꼭 해야 하는 게 상간소송이라고.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

“불륜을 걸렸다고 해서 유책이가 잘못했다고 빌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책이는 눈앞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지 밥을  푸는 나에게  온갖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거야? 진짜 가증스럽네. 이런다고 내가 너랑 살 거 같아? 남편을 속이는 여자랑 어떻게 같이 사냐. 그동안 나 속이느라 재밌었냐. 나는 걔랑도 안 살고 너랑도 안 살아”     


예고 없이 소장을 보낸 나는 졸지에 남편을 속이는 가증스러운 여자가 됐다.


22년 초부터 나와 아이들을 속이고 그 여자를 만나면서 썸을 타고 결국 둘이 사귀기로 하고 날짜까지 세어가며 불륜질을 했던 나보다 더 가증스러운 유책이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밥그릇을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유책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깔이 이미 사람 눈깔이 아니었다. 집에 일찍 들어온 아빠가 반가워서 빨리 밥 먹고 아빠랑 놀아야지 하며 좋아하던 딸들이 보이지도 않는것 같았다.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정말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너 블랙박스 보는 건 누가 알려줬어?”     


나를 얼마나 등신으로 생각했으면 유책이는 어떻게 블랙박스 보는 걸 알았냐고 계속 물어봤다.


유책이가 보기에 나는 정말 다루기 쉬운 여자였다.  똑같이 맞벌이를 하더라도 나는 퇴근 후 집에 와서 살림과 육아를 했고, 남자는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유책이는 동료들과 술도 마시고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골프, 맛집 탐방, 3040설렘주의 라는 밴드에 가입했을 때도 남자는 인맥이 넓어야 집안에 큰일 생길 때 도와줄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보내줬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나는 친구들과 약속 한번 잡으려면 며칠 전부터 미리 얘기를 해야 유책이 일정에 맞춰 겨우 잡을 수 있었는데.     


유책이는 항상 나에게 남자가 인맥을 쌓으려면 밖으로 돌고 여자는 집에 일찍 와서 애 잘 키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했다. 결혼해서 애도 있는 사람이 3040 설렘주의 밴드에 가입한 게 이상해서 왜 그런 밴드에 가입했냐는 나의 질문에 퇴직 후 직장사람들밖에 모르는 인생이 남자로서 얼마나 초라한지 아냐며 인맥을 위해서 미리부터 사람들을 사귀어놔야 한다는 유책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더욱이 유책이는 밴드에서 본인의 직업이 중앙부처 공무원인걸 알면 사람들이 시시하고 재미없어해서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못 피운다고 나를 안심시켰고 얼굴 팔리면 안 된다고 남의 사진과 가명을 쓰며 모임에 나갔다.  밴드에서 만난 여자를 누나라고 불렀다가 이름을 불렀다가 농담까지 하면서 친하게 지냈고 번개가 있음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술을 먹고 오면 주말은 피곤하다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저녁에 다른 약속을 잡고 또 나갔다. 나는 유책이가 말하는 인맥이 쌓이고 사회생활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런 나의 배려와 희생을 이용해서 온갖 재미를 다 보고 다녔다.          


 사회생활을 핑계로 밖에서 재밌게 놀던 자기만의 음탕한 사생활과 이제야 만난 천생연분 그 여자와의 사랑이 들킨 게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 죽을 것 같아하는 유책이를 보는 순간 그동안 나는 이 집안에서 동반자나 배우자가 아니라 살림하는 하녀, 애 키워주는 아줌마, 돈 벌어 오는 시녀에 불과했다는 고통스러운 자각이 나를 산산조각 냈다.                     

작가의 이전글 암을 고치는 만병통치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