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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씩씩한 스텔라 Nov 27. 2024

"학생은 어뒈가 아파서 왔나?"

모든 경험에는 가치가 있다.

24년 11월

수술받은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바로 재활병원으로 입원하기로 했다.

나의 고민은 수술받은 병원 근처의 재활병원으로 갈 것인지 집 근처의 재활병원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수술받은 병원 근처의 재활병원으로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에는 만약에라도 응급상황이 생기면 바로 수술한 병원으로 갈 수 있다는 거리적 이점이었다. 그러나 서울이면서  큰 병원 근처의 재활병원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조카 말고는 나를 간병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는 조카에게 또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집 근처 재활병원은 아이들이 면회를 온다면 볼 수 있었고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병원비 부담이 적었지만 만약에라도 응급상황이 생기면 대처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응급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재활병원으로 가는 것이니 집 근처 재활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집 근처 재활병원으로 가기로 했으니 어느 재활병원으로 가야 하는지도 선택해야 했는데 신경외과 원장이 있고, 규모가 제일 큰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퇴원하기 전 알아보니 다행히도 입원이 가능하다고 하여 수술한 병원에서 작성해 준 전원의뢰서를 들고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


재활스케줄을 짜기 위한 재활의학과 원장님의 진료가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안경을 쓴 원장님이 컴퓨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 수술받으신 후 몸 상태는 어떠셨어요?"

"거의 못 걸었고 오심이 심해서 어지럼증 약을 먹고 추가로 주사도 맞았어요. 욕창매트도 깔고 누워있었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따로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 다행히도 불편한 곳은 따로 없는데,  어지러움이 있어요. 3주 동안은 절대로 무거운 것을 들거나 복부에 힘을 주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런닝에서 천천히 걷기가 있는데 하실 수 있겠어요?"

"아니요. 런닝에서 걷는 게 겁이 나요. 지금은 못할 것 같아요. "

"그럼 기립기부터 하시고 안정기 되면 천천히 걷기 하기로 하시죠. 환자분은 뇌종양 수술 후 오신 거라 복부에 힘이 들어가거나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되기 때문에 재활치료실에 공지사항으로 치료사님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네 꼭 좀 부탁드려요. 저는 지금 재활보다 절대안정이 더 필요한 거 같아요"


한 달 동안 잘 회복해서 집으로 가는 것. 나의 목표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내가 있기로 한 병동으로 들어오니 환자들 거의 대부분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나처럼 뇌종양으로 수술받고 온 분들은 거의 없었고 뇌경색이나 뇌출혈로 편마비가 와서 재활받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휠체어에 앉아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상태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던 우리나라를 이렇게 발전할 수 있도록 젊은 시절을 불태우셨던 분들이었을 것이다.


병실의 시계는 느리다.

여기는 다들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이곳의 시간은 바깥세상과 다르게 흘러갔고 느리고 천천히 움직여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매일 바쁘고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삶이 제한속도 30에  멈춰버린 것 같았다.

삶의 속도가 느려지니 못 보고 지나치던 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고 깨닫게 되었다.

감정 없이 지나치던 길가의 가로수는 눈부신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전령사로 병실 창밖에서 내려다보니 노란색의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보였다.


나의 중요한 재활은 기립이었는데

기립은 말 그대로 한 곳에 곧은 자세로 30분 동안 서있는 것이다.

그동안 못 움직여서 빠진 다리힘을 기르고 서있는 자세를 교정하는 동안

티비를 보듯이 창문 너머 바깥풍경을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또한 기립하는 동안 옆 환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어서 정신적인 안정감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타임에 기립을 하시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모든 말을 노래로 하셨다.


치료사가 어떤 질문을 하든 할머니는 모든 대답을 노래로 하셨다.

그날 그날 하고 싶은 말이나 기분에 따라 가사는 바뀌지만 흥은 바뀌지 않았다.


흥이 있고 가락을 즐길 줄 아시던 할머니가

아픈 몸에 영혼이 갇혀 얼마나 답답하시면

할 수 있는 말을 노래로 뽑아내실까!

무슨 말이든 노래로 뽑아내는 그 여인이 새삼스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나이 든 여인이 노래로 남겨놓은 삶이 궁금해졌다.


나는 기립기 재활에서 꽤나 눈길을 끄는 존재였는데

외모를 떠나 머리가 검은색이라는 것과 나이가 젊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열심히 기립을 하며 창밖의 세상을 티브이 보듯 재미나게 보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학~~생~은~ 어 뒈 가~ 아~파서~~~ 왔~~나~~"


40넘은 나에게 학생이라니 처음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줄 알았다.

"학생이요?!  제 딸이 학생이에요. ㅎㅎㅎㅎ저요? 저는 뇌수술을 했어요"

" 젊~은 양반은~~ 이~런~~ 데~ 오~래 ~~ 있으면~~ 안돼~~~~"

"네 여사님도 얼른 쾌차하세요"


나의 기립 재활은 언제나 그 할머니의 노래로 시작하고 끝났는데 알고 보니 나랑 같은 병동에 계시는 분이었다. 다만 중증환자여서 나와 정반대 편에 있는 입원실을 쓰셨기에 내가 못 봤던 거였다.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없어도 매일매일 하이워커를 끌고 병실복도를 걸었다.

나의 노력과 운동은 배신하지 않고 몸에 힘이 들어가고 체력도 많이 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재활병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모든 경험에는 가치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재활병동의 수요일은 내가 머리를 감을 수 있는 날이었다.

아직 머리를 숙이지 못하는 나는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혼자 머리도 못 감는다.

원래 머리 감는 시간은 오후  2:30분이랬는데 오후 재활 가기 전에 머리를 감고  싶어서

간병인에게 머리를 감겨 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간병인 여사님은 시간 날 때 얼른 하자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머리를 감겨주시는데 두피까지 빡빡 긁어주셔서 개운함에 속이 다 시원했다.


머리를 숙이지 못한다는 나에게

"그럼 세수는 어떻게 해?"

라고 묻는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술하고 지금까지 고양이세수 하고 있어요. ”

“그럼 내가 세수도 해줄게”

나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어린애처럼 얼굴을 씻긴다.


코에 손을 대며

"흥!"

소리를 낸다.


본인도 웃겼는지 웃음을 참지 못한다.

나 또한 이 상황이 재밌어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나는 7살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긴 인생에서 한 번쯤 느려져도 괜찮아!

나는 삶의 다채로움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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